중세미술
814년 1월 28일, 샤를마뉴는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그는 평소 즐겨 찾던 아헨의 온천에서 목욕을 한 뒤 갑작스러운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궁정 학자 아인하르트가 기록한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병이 시작된 뒤 거의 일주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물만 조금 마시며 버텼다. 그러나 증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마침내 814년 1월 28일 아침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늑막염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의학 수준에서는 정확한 진단이 어려웠기 때문에 폐렴이나 다른 호흡기 감염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지만, 중세 사료에는 고열과 늑막염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종 직전 그는 성체성사를 받고 신앙 안에서 평온하게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아헨의 왕실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샤를마뉴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지만, 적자로서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세 아들 가운데 피핀과 샤를은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결국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루이 1세가 제국을 계승하였다. 루이는 813년 생전에 샤를마뉴에 의해 공동 황제로 즉위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큰 혼란 없이 제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루이에게는 '경건왕(Pius)'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는 뛰어난 군사적 업적 때문이 아니라 깊은 신앙심과 교회를 중시했던 통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의 군주들은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는 별칭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았다. '용맹왕', '대머리왕', '단순왕', '비만왕'처럼 외모나 성격, 업적을 반영한 별명이 붙었는데, 루이는 무엇보다 신앙과 경건함으로 기억되는 황제였다.
'경건왕'이라는 별명은 단순히 루이의 신앙심이 깊었다는 의미를 넘어 그의 통치 이념 전체를 보여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도원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황제에 오른 뒤에도 기도와 예배, 금식과 자선을 실천하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자신을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군주로 이해하였으며, 교회를 제국 통치의 핵심 축으로 삼고 수도원과 성직자의 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특히 수도원 규율을 정비하고 성직자의 도덕성을 강화하는 등 카롤링거 교회 개혁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경건함은 정치적 행동에서도 드러났다. 822년 아티니(Attigny) 공의회에서 그는 친조카이자 이탈리아 왕이었던 베른하르트(Bernard of Italy)의 반란을 진압한 뒤 그를 실명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던 일을 비롯해, 통치 과정에서 저질렀다고 생각한 여러 잘못에 대해 공개적으로 참회하였다. 베른하르트는 형벌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루이는 이를 평생 자신의 죄로 여겼다. 그는 주교들과 귀족들 앞에서 황제의 예복을 벗고 참회자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였다. 중세 슬롯에서 황제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이는 황제 역시 하나님의 법 아래 있는 존재라는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권력보다 신앙과 도덕적 바카라임을 우선시했던 그의 통치 철학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신앙적 덕목이 반드시 정치적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루이는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면서도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분할 상속 관습을 조화시키려 했지만, 후계 문제를 일관되게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는 817년 제국 질서령(Ordinatio Imperii)을 발표하여 장남 로타르를 공동 황제이자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 세우고, 둘째 루트비히와 셋째 피핀에게 각각 바이에른과 아키텐을 맡겨 제국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823년 두 번째 황후 유디트에게서 막내 샤를이 태어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루이는 막내아들에게도 영토를 나누어 주기 위해 여러 차례 상속 계획을 수정하였고, 이미 후계권을 인정받았던 로타르와 루트비히, 피핀은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여겼다.
특히 장남 로타르는 황제이자 제국의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자신이 우월한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한 반면, 막내 샤를의 어머니 유디트는 아들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새로운 영토 분배를 요구하였다. 귀족들 역시 각기 다른 왕자를 지지하며 권력 다툼에 뛰어들었고, 왕실 내부의 갈등은 곧 제국 전체를 뒤흔드는 정치적 분열로 확대되었다. 루이의 통치 말기 제국은 끊임없는 반란과 내전에 시달렸으며, 후계 문제는 결국 카롤링거 제국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840년 루이가 세상을 떠나자 후계 갈등은 마침내 전면적인 내전으로 폭발하였다. 장남 로타르 1세는 자신이 황제라는 지위를 내세워 아버지가 남긴 제국 전체에 대한 우월한 통치권을 주장하였다. 반면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샤를은 각자의 왕국을 독립적으로 지배하기를 원했고, 로타르의 패권을 저지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형제 간의 상속 분쟁은 카롤링거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841년 벌어진 퐁트누아(Fontenoy) 전투에서는 형제들이 이끄는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당시 프랑크 귀족과 기사 계층이 대거 참전하면서 전투는 극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수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들은 이 전투를 두고 "프랑크인들이 서로의 피를 흘리며 제국을 스스로 파괴한 비극"이라고 기록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이듬해인 842년 루트비히와 샤를은 로타르에 공동으로 맞서기 위해 스트라스부르 서약(Strasbourg Oaths)을 맺었다. 흥미로운 점은 루트비히가 상대 군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로망스어(고대 프랑스어)로, 샤를 역시 상대 군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고대 고지 독일어로 각각 맹세를 낭독했다는 사실이다. 이 서약문은 오늘날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며, 동시에 하나의 프랑크 제국 안에서도 이미 서로 다른 언어와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 당시 공식 문서와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였지만, 두 왕은 의도적으로 상대 군대의 일상 언어를 선택하였다. 이는 단순한 언어 선택이 아니라 "나는 당신들의 군주와 맺은 동맹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 모두가 이 약속의 증인이다."라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상대편 병사들이 직접 서약을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동맹의 신뢰를 공개적으로 확인하고, 로타르에 맞선 공동 전선을 더욱 굳건히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측 모두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내전은 1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퐁트누아 전투에서 로타르가 패배했음에도 어느 누구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세 형제는 결국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843년 베르됭에서 체결된 베르됭 조약에 따라 로타르 1세는 황제의 칭호를 유지하는 대신 북해에서 이탈리아에 이르는 중프랑크를, 루트비히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서프랑크를 각각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세 왕국의 독립적인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정치적 타협이었다. 이로써 샤를마뉴가 평생에 걸쳐 건설한 거대한 카롤링거 제국은 하나의 통일 제국으로서 막을 내렸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훗날 각각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적 모태가 되었다.
로타르 1세가 차지한 중프랑크는 북해에서 이탈리아까지 길게 이어진 띠 모양의 영토였다. 오늘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로렌, 알자스, 스위스, 북이탈리아 등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지만, 하나의 민족이나 언어, 경제권으로 묶인 국가가 아니었다.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지역과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뒤섞여 있었고, 알프스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행정적으로도 통치가 어려웠다. 또한 동쪽의 동프랑크와 서쪽의 서프랑크 사이에 끼어 있어 끊임없이 양측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약점도 안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로타르 1세가 855년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그의 세 아들은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상속 관습에 따라 중프랑크를 다시 나누어 상속받았다. 장남 루이 2세는 이탈리아와 황제의 칭호를, 둘째 로타르 2세는 훗날 그의 이름을 따 로트링겐(Lotharingia)이라 불리게 된 북부 지역을, 셋째 샤를은 프로방스를 물려받았다. 이로써 중프랑크는 하나의 통일된 왕국으로서의 결속력을 잃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869년 로타르 2세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찾아왔다. 이듬해인 870년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독일왕과 서프랑크의 샤를 대머리왕은 메르센 조약(Treaty of Meerssen)을 체결하여 로트링겐을 서로 분할하였다. 이 조약으로 중프랑크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그 영토는 이후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할과 재편을 거듭하였다.
특히 로트링겐과 알자스·로렌을 비롯한 옛 중프랑크의 영토는 이후 수세기 동안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차지하려는 핵심 분쟁 지역이 되었다. 중세에는 백년전쟁과 30년 전쟁등을 거치며 국경이 끊임없이 흔들렸고, 근대에 들어서는 민족국가의 형성과 함께 그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특히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알자스와 로렌은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다. 프랑스인들은 하루아침에 독일 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대신 독일어를 사용해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현실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었다. 작품 속 교사 아멜은 프랑스어로 진행하는 마지막 수업에서 "프랑스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말하며 조국을 잃은 사람들의 상실감과 민족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영토를 둘러싼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후 알자스·로렌은 다시 프랑스로 반환되었지만, 1940년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패배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이 지역을 다시 독일에 편입하였다. 주민들은 또다시 독일 국적을 강요받고 독일어 교육과 징병의 대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야 알자스·로렌은 최종적으로 프랑스 영토로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