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스카이라인과 내면의 우스트라아사나(Ustrasana)
올해는 짬이 날 때마다 하늘을 본다. 아무리 바빠도 고개를 든다. “바라볼 수 있는 하늘의 넓이가 곧 그 사람의 삶의 질”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젖히는 순간, 뻥 뚫린 파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꽉 눌려 찌그러졌던 폐포가 확 펼쳐지는 시원함, 휴대폰과 모니터에 파묻혔던 경추 마디마디가 풀리는 상쾌함. 넓은 하늘처럼 내 몸도, 숨길도, 마음도 비로소 넓어진다.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길, 도심 곳곳에 지어지는 고층 아파트들이 끝을 모르고 솟아오르고 있다. 드넓은 하늘을 받들고 있던 무등산의 부드러운 스카이라인은 이미 콘크리트 장벽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산과 들이 맵시 있게 그려내던 ‘아날로그적 곡선’이 사라진 자리에, 날카로운 창과 칼처럼 하늘을 찌르고 분절하는 도심 고층 빌딩의 ‘디지털식 직선’만 남았다. 이제 우리가 올려다볼 수 있는 하늘은 고층 빌딩에 잘게 찢겨 조각난, 간장 종지만 한 크기로 남겨질 것이다. 가슴이 콱 움켜잡히는 기분이 든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팟캐스트에서는 강뷰, 숲뷰 등 이른바 ‘뷰(View)’에 대한 예찬이 이어진다. 그런데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이 흥미롭다. 탁 트인 뷰는 관광지로서는 좋지만, 거주지로서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너무 넓은 하늘은 개인에게 보호받을 곳이 없다는 불안감을 심어주고, 광대한 무게에 압도되어 우울과 무기력을 초래할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로 수려한 조망권을 가진 이들이 호소하는 공허함을 떠올려보니 꽤 일리 있게 다가온다.
결국, 비싼 값을 치르고 하늘을 독점하려는 행위가 오히려 스스로를 불안의 늪으로 몰아넣는 미다스 왕의 황금손 같은 저주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줌 빛줄기조차 얻기 힘든 반지하방이나 창문 없는 고시원의 시민들에게 ‘하늘의 무게에 눌려 죽는 것’은 사치스러운 고민일 뿐이다. 이는 기아에 시달리는 이에게 선진국의 비만 치료법을 논하는 격이나 다름없다.
미다스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향한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자본은 상류층에게 펜트하우스의 하늘을 팔고, 그럴 여력이 없는 중산층에게는 전면 통유리 빌딩으로 만든 ‘가짜 하늘’을 판다. 사람들은 통유리에 담긴 파란색에 환호하며 상류층이 된 착각에 취하지만, 그 가짜 하늘에 속아 날아오르던 새들은 유리창에 부딪쳐 죽어간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경고했듯, 도심의 유리창 또한 죽음의 정적으로 가득 찬 ‘침묵의 도심’을 만들고 있다.
집에 도착해 답답한 마음으로 매트를 편다. 우스트라아사나(Ustrasana, 낙타 자세)를 취한다. 낙타는 끝없는 사막을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고 횡단하는 존재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서서 낙타의 걸음처럼 천천히, 허리를 뒤로 깊게 젖힌다.
두 눈을 감으면 무등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와 코끝에 걸린다. 서석대의 파랑이 내 눈가에 맺히는 상상. 펜트하우스도, 통유리 빌딩도 아니지만 비로소 진짜 하늘에 닿는 느낌이다. 고개를 숙이고 사느라 오늘 하루 제대로 보지 못한 하늘의 아쉬움을 이렇게 달랜다.
모든 이들이 최소한 삶의 희망을 잃지 않을 만큼, 마음 한 편에 쪽빛 하늘을 들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 환경을 우리 슬롯가 함께 만들어가길 꿈꾼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매트 위에서 낙타가 되고, 그 방법을 이웃들과 공유하며 버텨낼 것이다.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