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존중하되 규칙은 예외 없이: 문화적 차이를 넘어선 공존의 기술
PO : PM님, 진짜 속이 터져서 미치겠습니다. 저기 필드 코디네이터로 뽑은 아자마트(Azamat) 말이에요. 이번 달에만 벌써 네 번째 특별 휴가를 신청했어요. 사유를 보니까 첫 주에는 사촌 동생 결혼식, 둘째 주에는 이웃집 삼촌 장례식, 지난주에는 친척 대가족 모임이래요. 오늘은 또 먼 친척 고모가 아프다고 조퇴하겠답니다. 우리 본사 복무 규정상 경조사 유급 휴가는 직계 존비속과 형제자매까지로 명시되어 있다고 칼같이 잘랐더니, 표정이 굳어지면서 저를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악덕 고용주 보듯 하더라고요. 동료 직원들도 은근히 아자마트 편을 들면서 사무실 분위기가 서늘해졌는데, 제가 규정대로 한 게 잘못된 건가요?
PM : PO님이 규정대로 하려고 노력한 건 전혀 잘못이 아니에요. 오히려 원칙을 지키려는 바카라임감은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장은 '바카라상 위 규정집'보다 훨씬 복잡한 인류학적 공간이라는 걸 이해해야 해요. 장PO님이 겪은 건 ODA 초보 관리자들이 현지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부족 슬롯 및 대가족 문화의 충돌’입니다.
우리나라나 서구 슬롯는 핵가족 중심이라 직계가 아니면 남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시아의 수많은 현지 슬롯나 부족 중심 국가에서는 사촌의 팔촌, 심지어 같은 동네 이웃까지 다 ‘나를 증명하는 하나의 공동체’이자 대가족으로 봅니다. 그들에게 이웃의 결혼식에 참여하고 먼 친척의 장례식에 품앗이를 가는 건, 단순한 개인의 유희가 아니라 그 슬롯에서 매장당하지 않기 위한 필수적인 의무이자 인간의 도리에요. 그걸 한국식 잣대로 "사촌은 안 돼, 삼촌도 안 돼" 하고 무조건 잘라버리면, 현지 직원들 눈에는 '돈 몇 푼으로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게 만드는 잔인한 외국인 침략자'처럼 보일 수밖에 없죠.
PO : 그렇다고 아자마트 사정 다 봐주면 다음 주에 예정된 주민 교육 준비는 누가 하나요? 한 사람 편의 봐주기 시작하면 다른 직원들도 너도나도 먼 친척 핑계 대면서 나올 텐데, 일은 언제 합니까? 문화 존중도 좋지만 프로젝트 타임라인이 무너지면 본사 보고는 어떻게 해요?
PM : 맞아요. 딜레마가 바로 거기에 있죠. 현지 문화를 존중한답시고 다 들어주면 우리 프로젝트는 반드시 망합니다. 반대로 규정만 고집하면 직원들의 마음이 떠나서 협조를 안 하니 결국 망하죠. 그래서 현장에서는 ‘문화적 포용과 행정적 출구 전략’을 동시에 짜야 합니다.
우선 직원들을 모아놓고 공표하세요. "우리는 너희의 대가족 문화와 공동체적 의무를 깊이 존중한다"라고 기를 먼저 살려주는 겁니다. 그다음 행정적인 규칙을 얹는 거죠. "하지만 우리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과 정해진 기한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본사 규정 외의 경조사는 ‘무급 휴가(Unpaid Leave)’로 처리하거나, 혹은 ‘주말 대체 근무(Compensatory Time Off)’를 조건으로만 허가하겠다"라고 명확한 선택지를 주는 겁니다.
재미있는 건 뭔지 아세요? 유급이라고 생각할 때는 세상 모든 친척의 대소사를 챙기던 직원들이, "무급"이라거나 "주말에 나와서 밀린 일 해야 한다"고 조건을 붙이는 순간, 정말 중요한 행사가 아니면 알아서 스케줄을 조율하기 시작합니다. 문화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시스템을 통해 그들의 이기심이나 느슨함을 통제하는 완충 지대를 만드는 것, 그게 현지 관리자의 진짜 실력이에요.
PO : 아, 휴가 문제는 PM님이 말씀해주신 무급 및 대체 근무 카드로 정리를 하니까 아자마트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런데 어제 필드 출장을 다녀오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번에 기자재를 지원받은 농가 주민들이 너무 고맙다면서 제 차 트렁크에다가 커다란 전통 카펫이랑 현지 특산 보드카, 그리고 심지어 염소 한 마리를 억지로 실어주더라고요.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는데도 거절하면 자기들의 진심을 무시하는 거라며 화를 내기에 어쩔 수 없이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본사의 엄격한 반부패 규정과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이 생각나서 밤새 잠이 안 왔어요. 이거 당장 주민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감사를 받거나 오해를 사면 큰일 나잖아요.
PM : 트렁크에 염소까지 실려왔다니, 제대로 대접받고 오셨네요 장PO님. ODA 현장에서 주민들의 환대는 정말 뜨겁고 순수할 때가 많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걸 현장에서 정색하고 돌려줬으면 주민들과의 관계는 그날로 끝났을 겁니다. 현지 문화에서 손님에게 베푸는 환대와 선물(Hospitality)을 거절하는 건, 단순한 사양이 아니라 "나는 당신들과 친구가 될 생각이 없다"는 거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거든요. 관계가 단절되면 향후 모니터링이나 사후 관리는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구분해야 할 선이 있어요. 현지 주민들이 정성으로 내어주는 모든 것을 법의 잣대로 칼같이 쳐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현장 방문 때 테이블에 깔아주는 전통 빵(리뵤시카)이나 차, 직접 재배한 살구나 포도 같은 간단한 과일, 현장에서 함께 나누는 소박한 점심 식사 같은 것들 말이죠. 이런 ‘정서적 환대와 소액의 간식’은 프로젝트의 의사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매끄러운 윤활유이자 슬롯 통념상 완전히 수용 가능한 범위입니다. "난 청렴해야 하니까 물 한 모금도 안 마시겠다"며 버티는 관리자는 현지인들에게 그저 교만하고 정이 없는 이방인으로 보일 뿐이에요. 현장에서 그들과 눈을 맞추고 빵을 뜯어 나누는 것부터가 사업의 시작입니다.
문제는 PO님이 가져온 카펫이나 염소, 보드카처럼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했을 때 문제가 될 만한 고가의 물품이나 자산성 선물들입니다. 개인이 받은 뇌물이 아니라 ‘기관이 수령한 공식 기증품’으로 세련되게 둔갑시키는 프로토콜이 필요한 건 바로 이런 경우죠.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선물 대장(Gift Registry)’을 작성하세요. 언제, 어느 농가로부터, 어떤 취지로 무엇을 받았는지 사진과 함께 기록하고 PM인 저와 PO님이 공동 서명을 하는 겁니다. 카펫 같은 물건은 사무실 대기실이나 회의실 벽에 걸어두어 '주민들이 우리 기관에 준 기념품'으로 공공재화 하세요.
그럼 염소나 보드카 같은 소모성 물품은 어떻게 하냐고요? 다가오는 주민 공청회나 사업 평가회 때 마을 잔치 비용으로 재기부하거나, 현지 직원들의 명절 회식용으로 풀어서 모두가 공유하게 만드는 겁니다. 소박한 간식은 현장에서 감사히 기쁘게 받아 나누고, 덩치가 큰 선물은 서류와 절차를 통해 공적인 영역으로 승화시키는 것. 문화적 정성을 품어 안으면서도 행정적 투명성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 그게 진짜 현장형 컴플라이언스입니다.
PO : 선물 대장을 만드니까 마음이 확 편해지네요. 사무실 벽에 카펫을 걸어두니 직원들도 좋아하고요. 그런데 PM님, 다음 달 중순까지 끝내야 하는 농민 대상 농업 기술 교육 일정이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현지 강사들과 코디네이터들에게 일정을 독촉하면 맨날 돌아오는 대답이 "인샬라(신이 원하신다면)", 아니면 "자우트라(Zavtra·내일 할게요)"에요. 속은 타들어 가는데 현지인들은 태평성대입니다. 게다가 지금 우기(雨期)가 시작되려 하고, 곧 있으면 이들의 종교적 단식 월인 라마단까지 겹친다는데, 한국처럼 밤을 새워서라도 일정을 맞추자고 밀어붙여야 할까요?
PM : PO님, 한국의 속도전 마인드를 그대로 가져와서 현지인들을 쥐어짜면, 돌아오는 건 직원의 사표와 프로젝트의 폭망뿐입니다. 이들의 시간관념은 우리처럼 '초 단위로 쪼개진 직선'이 아니라, 기후와 종교에 매여 있는 '느긋한 곡선'에 가깝거든요. 게으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수백 년간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삶의 템포인 거죠. 특히 폭염, 우기, 라마단 같은 대형 이벤트는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현장의 절대적인 상수(Constant)입니다. 이걸 무시하고 계획을 짠 것 자체가 사실 우리의 설계 오류에요.
16년 동안 현장을 구르며 깨달은 건, 현지인들의 시간관념을 탓할 시간에 우리의 ‘마일스톤 설계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겁니다. ODA 베테랑들은 일정을 짤 때 절대 타이트하게 채워 넣지 않아요. 현지 기후와 종교 일정을 미리 파악해서 전체 타임라인에 최소 20~30%의 공식 버퍼(Buffer·여유 기간)를 무조건 심어둡니다. 라마단 기간에는 업무 효율이 반 토막 날 걸 미리 계산해서 가벼운 행정 업무나 데이터 정리 위주로 스케줄을 비워두는 식이죠.
그리고 "언제까지 다 해놔"라는 포괄적인 지시는 현지에서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업무를 아주 잘게 쪼개서 ‘일일 마일스톤(Daily Milestone)’으로 나누고, 매일 아침 10분씩 스탠딩 미션을 주어야 합니다. "다음 주까지 교육 준비해"가 아니라, "오늘 오후 4시까지 강사 3명에게 섭외 전화를 돌리고 결과를 단체 카톡방에 공유해줘"라고 지시해야 합니다. 막연한 내일(Zavtra)을 구체적인 오늘(Today)의 숫자로 쪼개어 눈앞에 들이미는 것,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기후와 문화적 지연을 미리 서류상 계획에 녹여내는 것만이 인샬라의 늪에서 프로젝트를 건져 올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PO님 : PM님, 이건 정말 조심스러운 부분이라 혼자 끙끙 앓다가 말씀드려요. 우리 현지 직원들 중에 몇 명이 하루에 서너 번씩 업무 시간에 기도실로 가더라고요. 한 번 가면 20~30분씩 자리를 비우는데, 타임라인이 급할 때는 속이 타들어 갑니다. 더 큰 문제는 금요일 오후에요. 현지의 종교적 특성상 금요일 대예배(주마 기도)를 드려야 한다면서 점심시간부터 오후 3~4시까지 통째로 사무실을 비웁니다. 금요일 오후만 되면 사무실이 완전히 마비되는 수준인데, 그렇다고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없고, 보고서 마감은 지켜야 하고…… 대안으로 금요일에 빠진 시간만큼 주말에 대체 근무를 시키거나 유연근무제를 적용해 볼까도 생각했는데, 현지 직원들의 반발 없이 이 상황을 정리할 방법이 있을까요?
PM : 아주 예리하고 심각한 현장의 딜레마를 짚으셨네요, PO님. 특히 무슬림 국가나 종교적 색채가 짙은 ODA 현장에서 한국인 초보 관리자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지점입니다. 섣불리 통제했다간 ‘종교 탄압’이나 ‘인권 침해’라는 프레임에 걸려 현지 슬롯 전체와 척을 지게 되고, 반대로 마냥 방치하면 프로젝트 기강과 타임라인이 완전히 무너지니까요.
PO님이 고민하신 유연근무제나 주말 대체 근무 같은 행정적 절충안도 훌륭한 접근입니다. 실제로 이미 채용한 직원들에게는 "우리는 너희의 종교적 의무를 깊이 존중한다. 다만 프로젝트의 공평성을 위해 금요일 오후 자리를 비우는 시간만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0분씩 연장 근무를 하거나, 해당 시간만큼 시급을 정산하자"고 계약서를 갱신하는 방식을 씁니다. 업무의 연속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공공의 규칙을 세우는 법이죠.
하지만 16년 동안 현장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은 진짜 최고 레벨의 팁은 따로 있습니다. 이미 들어온 직원과 지루한 규칙 싸움을 벌이기 전에, ‘채용 면접 단계에서부터 지혜롭게 걸러내는 것’이 백번 낫다는 사실입니다.
PO님 : 면접에서요? 하지만 면접에서 대놓고 "당신 종교 생활 때문에 금요일에 일 못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그것도 차별이나 법적 문제가 되지 않나요? 어떻게 지혜롭게 거를 수 있죠?
PM : 질문의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대놓고 종교를 묻는 게 아니라, ‘우리 프로젝트의 업무적 특성과 스케줄’을 철저히 앞세워 질문을 던지는 거죠.
예를 들어 면접관 자리에 앉아 지원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 프로젝트는 농민 대상 교육이 주로 금요일 오후나 주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특히 금요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는 본사와의 정기 화상 회의 및 긴급 현장 모니터링이 고정되어 있어서, 이 시간에는 단 10분도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업무에 완전히 몰입해야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복무 스케줄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100% 엄수할 수 있습니까?"라고 아주 구체적이고 단호하게 업무 환경을 바운더리로 쳐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배수진을 치고 질문을 던지면, 종교적 신념이 너무 강해서 금요일 대예배를 타협할 수 없는 지원자들은 스스로 표정이 굳어지거나 "그 시간엔 곤란하다"며 알아서 먼저 카드를 패스합니다. 반면, "그 정도는 개인적으로 조율해서 업무에 지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이는 이들은 종교적 유연성을 가진 셈이니 안심하고 뽑을 수 있죠.
행정 시스템을 고쳐서 사람을 통제하는 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듭니다. 애초에 우리 프로젝트의 ' 특수성'과 '핏(Fit)'이 맞지 않는 사람은 채용의 문턱에서부터 걸러내는 스크리닝 기술, 그게 현장 리스크를 제로로 만드는 진짜 베테랑 PM의 인사 비밀입니다.
PO님 : PM님, 오늘도 제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 있을 중간 평가 공유회 때문에 온 사무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잖아요. 마침 행정원인 마디나(Madina)가 자기 루틴 업무를 다 끝내고 앉아 있길래, "마디나, 지금 다들 바쁘니까 회의실에 배포할 유인물 복사랑 바카라자 제본하는 것 좀 도와줄래요?"라고 정중하게 부탁했거든요. 그랬더니 대뜸 제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그건 내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에 없는 내용인데요? 제 계약상 업무는 회계와 총무 가이드라인 관리입니다. 행사 준비는 현장 코디네이터 업무 아닌가요?"라며 칼같이 거절하는 겁니다. 다들 야근하며 땀 흘리고 있는데 자기 일 끝났다고 칼퇴근하는 뒷모습을 보는데, 얄밉기도 하고 괘씸해서 손이 다 떨렸습니다.
PM : 하하, 드디어 올 것이 왔군요 PO님. ODA 현장에서 한국인 관리자들이 현지 직원들에게 가장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상처받는 모먼트가 바로 이 '직무 기술서(JD) 들이밀기'입니다. 한국인들은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조직의 목표를 위해 유연하게 협업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잖아요. 반면, 과거 슬롯주의 배급제나 서구식 계약 문화의 영향을 받은 현지 직원들은 계약서에 적힌 문구 하나하나가 자기 노동의 절대적인 경계선입니다. 그들에겐 내 분장에 없는 일을 하는 게 '착한 것'이 아니라, '계약 위반이자 손해 보는 짓'이거든요. 문화적 코드가 완전히 다른 겁니다.
PO님 : 아무리 문화가 다르다지만, 프로젝트라는 게 칼로 두부 자르듯 업무가 안 떨어질 때가 많잖아요. 갑자기 돌발 상황이 터지거나 급한 서포트가 필요할 때마다 "내 JD에 없다"며 태업을 부리면 대체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갑니까? 매번 돈을 더 주겠다고 오버타임 수당을 얹어줄 수도 없고요.
PM : 맞습니다. 현장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늘 공백과 틈새 업무가 생기기 마련이죠. 이걸 해결하려면 감정적으로 "팀워크가 없다"고 다그칠 게 아니라, 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계약서의 언어’로 받아쳐야 합니다. 베테랑 관리자들은 채용 계약을 맺고 직무 기술서를 작성할 때, 맨 하단에 반드시 ‘치트키’ 같은 독소 조항이자 만능 치트키를 집어넣습니다.
PO님 : 만능 조항이요? 그게 어떤 건가요?
PM : JD의 가장 마지막 줄에 영어로 "Other duties as assigned by the PM or PO", 즉 "기타 프로젝트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PM 또는 PO가 정당하게 지시하는 임무"라는 문구를 단 한 줄 반드시 포함하는 겁니다. 이 한 문장이 있고 없고에 따라 관리자의 통제권이 하늘과 땅 차이로 갈립니다. 이 조항이 들어가 있으면 마디나가 "내 업무가 아니다"라고 할 때, 계약서를 펼쳐 들고 당당하게 지시할 수 있어요. "마디나, 네가 서명한 계약서 마지막 조항을 봐라. 지금 이 유인물 제본은 우리 프로젝트의 성패가 걸린 중요한 정당 업무이고, 내가 너에게 정식으로 배정한(Assigned) 임무다. 이건 계약 위반이 아니라 네 의무다"라고 계약의 논리로 압박하는 거죠.
PO님 : 아…… 그런 숨겨진 장치가 필요했군요.
PM : 그리고 평소에 업무를 지시할 때도 "다 같이 바쁘니까 좀 도와줘" 같은 한국식 온정주의 언어를 쓰면 안 됩니다. 그들에겐 그게 '부탁'으로 들리고, 부탁이니까 거절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지시할 때는 명확하게 공식적인 '업무 배정'의 형태로 가야 합니다. "마디나, 오늘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공유회 준비를 위한 '행정 서포트 시간'으로 지정합니다"라고 명확히 타임라인과 R&R을 규정해 주는 거죠.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을 움직이는 건 뜨거운 눈물이 아니라, 차가우면서도 명확한 계약서의 문구와 공적인 지시 체계라는 걸 명심하세요.
PO님 : PM님, 정말 손이 떨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우리 프로젝트에서 현지 농가에 배포할 농기계 납품 업체를 선정했잖아요. 그런데 탈락한 업체 대표가 제 방에 찾아와서 유감을 표시하며 슬쩍 흘리더라고요. 우리 현지 조달 담당자인 루스란(Ruslan)이 최종 후보에 오른 특정 업체로부터 뒷돈을 받고 내부 심사 기준을 미리 유출해 준 것 같다고요. 생각해보니 최근 루스란이 유독 그 업체를 강하게 추천하기도 했고, 정황상 심증은 99% 확실합니다. 당장 루스란을 불러서 대면 보고를 시키고 컴퓨터 하드디스크라도 포렌식해서 사실을 밝혀내야 할까요? 기관의 투명성이 걸린 문제인데 징계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PM : PO님, 속이 뒤집어지시는 건 십분 이해하지만, 지금 당장 루스란을 불러서 다그치는 건 최악의 하바카라(下策)입니다. 냉정하게 가슴을 가라앉히고 제 눈을 보세요. 현장에서 '증거 없는 의혹'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규칙은 ‘포커페이스’입니다. 섣불리 심증만 가지고 "너 뒷돈 받았지?"라고 들이밀었다가 루스란이 정색하고 "탈락한 업체의 악의적인 모함이다, 나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냐"며 인권 침해나 명예훼손으로 노동청에 맞고소를 하면, 오히려 우리가 코너에 몰립니다.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의 취조는 범인을 잡는 게 아니라, 범인에게 증거를 인멸할 시간과 방어 논리만 만들어줄 뿐이에요.
PO님 : 그럼 뻔히 부정부패가 의심되는데도 모른 척 눈감고 이 사업을 그냥 진행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코이카나 본사 감사에 걸리면 우리 프로젝트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데요.
PM : 모른 척하라는 게 아니라, ‘사법기관’이 아닌 ‘시스템 관리자’의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수사권이 없는 민간 관리자예요. 루스란의 과거 범죄 사실을 밝혀내려고 진흙탕 싸움을 벌일 게 아니라, 루스란이 더 이상 부정을 저지를 수 없도록 ‘의사결정 구조를 즉시 분산’시켜 고립시켜야 합니다.
우선, 이번 조달 심사는 '절차적 공정성 보완'을 명분으로 전면 재심사에 부치세요. 루스란 1인에게 집중되어 있던 업체 평가 권한을 박탈하고, PO님과 저, 그리고 현지 외부 전문가까지 포함된 ‘3인 다면 평가 위원회’를 구성하는 겁니다. 루스란에게는 "조달 과정의 투명성을 본사 수준으로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행정적 명분을 대면 그만입니다. 본인이 켕기는 게 있다면 이 조치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고, 유착했던 업체에게 "더 이상 내 힘으로 손쓸 수 없다"며 발을 빼게 될 겁니다.
PO님 : 아…… 루스란과 정면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가진 부정의 연결고리를 시스템으로 끊어버리는 거군요.
PM :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조용히 덫을 놓으세요. 루스란의 직무 기술서(JD)와 권한을 조정해서 재무나 업체 소통 창구에서 서서히 배제하고, 다른 행정 업무로 로테이션(순환 보직)을 시키는 겁니다. "프로젝트 후반기를 맞아 멀티태스킹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라는 그럴싸한 명목을 붙여서요.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직원들은 대단한 도덕적 각성을 해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아, 이 조직에서는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혼자서 독식할 수 있는 구조가 안 나오는구나', '까딱하다간 내 밥줄이 끊기겠구나'라는 숨 막히는 시스템 압박을 느낄 때 손을 씻거나 알아서 제 발로 나갑니다. 심증만 있을 때는 분노를 서류 뒤로 감추세요. 칼을 휘두르지 않고도 상대를 무력화하는 시스템의 힘, 그게 베테랑 PM이 거친 현장에서 청렴을 지키는 소리 없는 기술입니다.
PO님 : PM님, 저 정말 고민이 있어요. 요즘 현지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인 디쇼드(Dilshod)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디쇼드는 나이도 저보다 열 살 이상 많고, 이 지역에서 개발 사업만 13년 넘게 한 베테랑이잖아요. 그래서인지 제가 중간관리자로서 업무 지시를 내리거나 보고서 수정을 요청하면 묘하게 겉돌아요. 면전에서 대놓고 반박하진 않지만, "PO님은 현지 사정을 잘 모르셔서 그렇다", "과거에는 다 이렇게 해도 아무 문제 없었다"라며 은근히 제 지시를 뭉개고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현지 스태프들 앞에서도 제 체면이 전혀 서지 않는데, 한 번 날을 잡고 누가 위아래인지 확실하게 기강을 잡아야 할까요?
PM : PO님, 단둘이 있을 때 디쇼드 때문에 속앓이하며 자존심 상했을 그 마음, 정말 잘 압니다. 서른 안팎의 젊은 한국인 PO가 현지에 와서 나이 마흔, 쉰 살 먹은 현지인 전문가를 리드한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중압감이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디쇼드를 앉혀놓고 "내가 PO고 당신은 직원이니 내 말을 들으라"며 직급으로 찍어 누르려는 순간, 그 기 싸움은 PO님의 완패로 끝납니다.
PO님 : 직급상 제가 상급자인데도 그냥 참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자꾸 밀리면 앞으로 사업 관리가 아예 안 될 텐데요.
PM : 참으라는 게 아니라 ‘싸움의 기술’을 바꾸라는 겁니다. 디쇼드가 PO님의 지시를 은근히 무시하는 진짜 이유가 뭘까요? 자존심 때문입니다. 중앙아시아는 나이와 경력, 그리고 '체면(Avtoritet)'을 극도로 중시하는 문화예요. 자기보다 한참 어린 한국인 PO가 사사건건 지적하고 지시하는 모습이 현지 스태프들 보기에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겁니다. 디쇼드 같은 시니어 직원을 다룰 때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되, 목줄은 내가 쥐는 외교술’이 필요합니다.
PO님 :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되 목줄을 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PM : 첫째,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디쇼드의 체면을 하늘 끝까지 세워주세요. 전체 회의를 할 때 "이번 건은 우리 지부의 최고 전문가이신 디쇼드 선생님의 고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마이크를 먼저 넘기세요. 사람 많은 곳에서 그의 권위와 경력을 인정해 주면, 디쇼드는 현지 스태프들 앞에서 체면을 살릴 수 있어 PO님에게 심리적인 부채감을 가지게 됩니다.
둘째, 진짜 업무 지시와 피드백은 철저히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하세요. 디쇼드를 PM 방이나 조용한 회의실로 따로 불러 차 한 잔을 대접하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디쇼드 씨, 저는 디쇼드 씨의 10년 경력과 현장 지식을 깊이 존중합니다. 디쇼드 씨가 없으면 이 프로젝트는 굴러가지 않아요. 다만, 저는 본사와 코이카의 엄격한 행정 기준을 맞추어 프로젝트의 예산을 방어해야 하는 바카라임이 있습니다. 제가 디쇼드 씨의 전문성을 현장에 녹여낼 수 있도록, 서류 작업과 행정 절차에서는 디쇼드 씨가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PO님 : 아…… 그의 전문성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서로의 '역할'이 다름을 인정하고 파트너로 인정해 주는 어프로치군요.
PM : 정확합니다. "내 지시가 맞으니 따르라"가 아니라, "당신의 전문성을 빛나게 하기 위해 내 행정적 가이드가 필요하다"로 프레임을 바꾸는 거죠. 시니어 직원들은 자기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면, 그때부터는 꼰대 짓을 멈추고 자기가 가진 네트워크와 노하우를 PO님을 위해 아낌없이 풀기 시작합니다.
현장에서 진짜 무서운 리더는 목소리 높여 기강을 잡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대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채워주면서,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부드러운 외교관이죠. 디쇼드의 나이와 경력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것들은 PO님이 영리하게 활용하기만 하면 우리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