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도 복장이 있다
오늘도 나는 빨강을 집어 들었다.
보이는 것은 상관이 없다. 입고 싶고 쓰고 싶은 것을 몸에 걸친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워서가 아니라
식어버린 마음의 재를 가장 완벽하게 덮을 수 있는 색이었기에 선택한다.
사람들은 내가 칠한 푸른빛을 보며
바다의 깊이와 넓음을 말하지만, 그 깊고 한 밑바닥에 침전된 이름 없는 외로움의 무게는 보지 못한다.
노랑을 칠할 땐 한없이 맑게 웃었고 보랏빛을 섞을 땐 신비로운 척을 했다. 화려한 색채들이 캔버스 위를 채워갈수록 진짜 나라는 풍경은 선명한 물감 뒤로 점점 아득해졌다.
모든 색을 다 섞으면 결국 검정이 되듯, 내가 세상을 향해 내보인 수많은 감정의 색들은 사실 내 안의 무채색을 숨기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변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붓을 내려놓고 정적만 남은 밤이 지나, 색이 필요한 낮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칠하는 것이다.
마치 고독에도 복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다. 고독에도 복장이 있다.
어둠이 다가와 모든 색을 조용히 지워줄 때야
나는 아무런 색도 입히지 않은 투명한 나를 가만히 안아준다. 그리고 낮이 오면 나에게 색을 입혀주는 것이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마음보다 먼저 색을 선택한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옷의 색을 고르고, 어떤 표정으로 하루를 견딜 것인지 결정하기 전에 거울 앞에 선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집을 나서는 일에도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다. 마음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지만 세상은 정해진 시간에 시작되고,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무관하게 타인의 눈에 비칠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색을 고르는 일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세상에 내보이기 전에 한 겹의 표면을 마련하는 일이다.
검은색을 입는다고 해서 반드시 슬픈 것은 아니다. 검은색은 슬픔을 드러내기보다 슬픔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빛을 받아들이면서도 쉽게 속을 보여 주지 않는 색.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대신 검은 옷을 입는다. 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답하는 순간 자신의 경험이 타인의 이해에 맞는 크기로 줄어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은 종종 설명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모양을 잃는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잠시 안타까워할 만한 일로 정리된다. 그 차이를 견디기 어려운 사람은 차라리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검은색은 그 침묵을 대신 입어 준다.
그러나 침묵에도 색이 있다.
누군가는 흰색을 입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살아간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 구김 없는 셔츠,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 그에게 정돈은 아름다움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방법에 가깝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질서가 사라졌으므로, 눈앞의 것들만이라도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흩어진 물건을 하나씩 바로잡다 보면 흩어진 생각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물론 생각은 물건처럼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는다. 서랍을 정리한다고 기억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며, 침대를 반듯하게 편다고 밤새 뒤척이던 마음이 평평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매일 아침 이불의 모서리를 맞춘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손을 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인간이 자신을 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거창한 결심이나 새로운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을 찾아내는 일. 마음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동안에도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식탁 위의 컵을 씻고, 외출하기 전에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일. 우리는 그렇게 하루의 가장자리부터 꿰매기 시작한다. 그 가장자리가 온전하다고 해서 하루 전체가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너진 부분을 당장 세상 한가운데 내놓지 않아도 된다.
색은 그런 시간을 벌어 준다.
붉은색은 어떠한가. 사람들은 붉은색에서 열정과 생명과 욕망을 읽는다. 그러나 붉은색을 선택한 사람이 반드시 뜨거운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견디기 위해 가장 강렬한 색을 걸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부의 온도가 낮아졌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바깥에 선명한 불빛 하나를 내거는 것이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색은 자신이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표시가 된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아직 사람들 사이를 걸을 수 있다고, 오늘도 내 몫의 시간을 살아 내고 있다고.
그렇다고 모든 색을 심리의 암호로 읽을 수는 없다.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고요를 갈망하는 것은 아니고, 노란색을 입은 사람이 언제나 밝은 것은 아니다. 색에 인간의 마음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려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타인을 쉽게 이해했다고 믿는 오류에 빠진다. 한 사람의 선택에는 설명할 수 있는 이유와 설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함께 들어 있다. 오래 입어 편안한 옷일 수도 있고, 우연히 손에 잡힌 것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선물한 색을 버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모든 사연을 지워 버린 채 색 하나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가 입은 옷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 위에 덧칠하는 셈이다.
마음을 감추는 일은 언제나 타인을 속이기 위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감정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조차 공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될 것 같은 마음이 있다. 끝났다고 말하면 정말 끝나 버릴 것 같고, 그립다고 인정하면 더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마음. 사람은 때로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어느 쪽도 온전한 이름을 갖지 못하고, 미련과 애정이 한 몸처럼 남아 어느 하나만 떼어 낼 수 없을 때, 우리는 감정의 가장자리를 맴돈다. 그것을 서둘러 정의하지 않기 위해 다른 일에 몰두하고, 평소와 같은 옷을 입고, 익숙한 길을 걷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거리에는 수많은 색이 있다. 신호등의 붉은빛, 상점 유리창에 비친 노란 조명, 행인들의 검은 외투와 희미하게 바랜 청바지. 사람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짧은 순간 서로의 표면을 본다. 잘 어울리는 옷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딘가 피곤해 보인다고 느끼거나, 특별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시선을 거둔다. 한 사람의 하루는 그렇게 타인의 무관심 속에서 안전하게 지나가기도 한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때로는 서운하지만, 때로는 다행스럽다. 내가 감추고 있는 것을 아무도 묻지 않았다는 것.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이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그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당황한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하고, 늘 밝던 사람이 갑자기 침묵하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묻기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먼저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은 우리가 준비한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 부담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표정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고, 옷차림을 보고 그의 성격을 짐작하며, 말투를 통해 마음의 깊이를 가늠한다. 복잡한 사람을 단순한 몇 가지 특징으로 바꾸어 놓으면 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드러내는 것보다 많은 것을 품고 있다. 단정한 사람에게도 정리되지 않은 기억이 있고, 무심해 보이는 얼굴에도 오래 붙들고 있는 이름이 있으며, 화려한 색을 선택한 사람에게도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어둠이 있다.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한 가지 모습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증거다. 우리는 슬프면서도 웃을 수 있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도 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을 수 있으며, 무너진 뒤에도 다른 사람의 안부를 물을 수 있다.
감정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
어쩌면 성숙해진다는 것은 타인의 색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는 일이 아닐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슬픔을 묻지 않고, 붉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용기를 기대하지 않으며, 늘 흰색을 고르는 사람에게 깨끗한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 일.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두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섣불리 결론 내리지 않는 태도.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있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 그 사정이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하더라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일.
모든 비밀이 밝혀져야만 진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기로 한 마음에도 진실은 있고, 끝내 설명되지 않은 감정에도 존재의 자격은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 다만 타인이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필요는 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눈앞의 표정만으로 한 사람의 하루를 단정하지 않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지나치게 밝은 색을 보고 그 사람의 삶까지 밝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날에는 내가 선택한 색이 무엇을 대신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손에 잡힌 옷을 입고 집을 나서며, 그 선택이 단순한 습관인지 오래된 취향인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의 결과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우연히 마주한다.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 내가 고른 색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 색이 감추고 있는 것을 말해 주지 않는 얼굴. 나는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유리창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것은 내 모습을 비추면서도 내 마음을 해석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지 않고, 왜 오늘 이런 옷을 입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빛이 닿는 만큼의 모습을 돌려줄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타인에게 바라는 것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자신을 전부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을 함부로 채워 넣지 않는 사람. 감추어진 마음을 억지로 드러내려 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마음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
색은 마음을 감출 수 있다. 그러나 감추는 일과 없애는 일은 다르다. 검은색 아래에도 슬픔은 남고, 흰색 아래에도 혼란은 남으며, 붉은색 아래에도 식어 가는 마음은 남는다. 색은 감정을 지우는 대신 그것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을 바꾼다. 우리는 그 표면을 통해 하루를 살아가고, 때로는 그 표면 덕분에 하루를 더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의 색을 벗겨 내려고 하지 않으려 한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감추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보다, 그 마음이 아직 감추어져 있어도 괜찮은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더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드러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끝내 말하지 못한 것과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부분까지 품은 채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저마다의 색으로 서로를 지나친다. 누군가는 어두운 색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누군가는 밝은 색으로 세상에 응답하며, 누군가는 그날의 마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색을 입고 길을 건넌다. 그중 누구의 마음도 겉으로 보이는 색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감추고 있는 마음을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그 마음이 끝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색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색이 가리고 있는 모든 것을 볼 권리까지 갖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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