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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를 맡기는 일

기대는 일과 견디는 일 사이에서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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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공기에게 몸을 던지고

나무는 땅 아래로 깊이 저를 내려놓는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홀로 서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을 가만히 부르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를 지탱하던 서러운 힘이 풀린다.

그늘이 햇살에게 몸을 누이듯

내 모든 경사를 맡긴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 존재인지 혼자 서 있을 때는 잘 알지 못한다.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있는 동안에는 몸의 무게가 발밑으로 흩어지고, 하루를 살아 내는 동안에는 감당해야 할 것들이 저마다의 이름으로 나뉘어 무게라는 사실조차 잊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 지켜야 할 약속, 쉽게 꺼내 놓을 수 없는 마음. 그것들은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결국 한 사람의 안쪽으로 모여든다. 우리는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벽에 등을 기댄다.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도, 잠시 쉬어 가기 위해서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그저 더는 똑바로 서 있는 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밀어 내지도 않는다. 그 무심한 단단함에 몸을 맡기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기댄다는 것은 무너지는 일과 다르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무너지는 사람은 자신의 무게를 더는 감당하지 못하지만, 기대는 사람은 그 무게가 어디에 놓일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둘 사이에는 아주 작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바꾸는 것은 대개 그런 작은 차이들이다. 끝내 놓아 버리는 것과 잠시 내려놓는 것, 돌아서는 것과 몸을 기울이는 것, 아무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 사이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가 놓여 있다.


나는 한때 타인에게 기대는 일을 빚을 지는 일처럼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 주면 언젠가는 그만큼의 마음으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건넨 침묵에는 상대의 침묵이 돌아와야 했고, 내가 견뎌 준 시간에는 상대가 견뎌 줄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조차 장부의 한쪽에 기록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고받은 것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때에만 관계는 공평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계산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이었다. 어떤 날에는 내가 더 많이 주었고, 어떤 날에는 상대가 나보다 오래 머물렀다. 한쪽이 지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그 침묵을 견디며 곁에 앉아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같은 양으로 나눌 수 있을까.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보낸 한 시간이 다른 누군가의 외로움 앞에서 보낸 한 시간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음에는 저울이 없어서가 아니라, 저울에 올려놓는 순간 본래의 무게를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대는 일은 상대에게 자신의 무게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힘으로는 알 수 없었던 무게의 모양을 함께 알아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지탱하는 방식과 다른 사람이 나를 받쳐 주는 방식은 같지 않다. 혼자 서 있을 때는 무게가 온몸에 고르게 퍼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의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대면 그동안 어디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굳게 다문 턱과 올라간 어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긴장했던 등. 견딘다는 말 아래 감추어 두었던 작은 힘들이 하나씩 풀린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불필요한 힘까지 사용한다. 들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들고, 괜찮다는 말을 실제보다 빨리 꺼내며,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오랫동안 궁리한다. 그러는 사이 버티는 능력은 미덕이 되고, 기대지 않는 태도는 독립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홀로 설 수 있다는 사실과 반드시 홀로 서야 한다는 믿음은 서로 다른 것이다. 전자는 능력이지만 후자는 때로 자신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나는 이제 곧게 서 있는 사람만을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쪽 무릎을 굽히는 사람, 잠시 눈을 감는 사람, 제 몸보다 단단한 곳을 찾아 등을 기울이는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나무는 바람을 견디기 위해 흔들리고, 물은 바위와 맞서기보다 그 곁을 돌아 흐른다. 견딘다는 것은 언제나 정면으로 맞서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을 조금 기울여 더 오래 존재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곳이 기댈 만한 것은 아니다. 어떤 어깨는 잠시 머문 머리의 무게마저 부담스러워하고, 어떤 벽은 기대는 순간 차가운 금을 드러낸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나를 받쳐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랑한다고 해서 서로의 무게를 언제나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기대어야 하는지를 아는 일은 기대는 법을 배우는 일만큼 중요하다. 나를 받아 주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 몸을 기울이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소진일 수 있다. 기대어도 되는 곳을 알아보는 데에는 때로 오랜 상처와 침묵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의 실망으로 모든 기대를 거두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어깨가 나를 받쳐 주지 못했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어깨가 그러한 것은 아니고, 한 번 무너진 관계가 있었다고 해서 마음을 맡기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실패한 기대를 근거로 앞으로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 비가 샌 지붕을 보고 세상 모든 집에 비가 샌다고 믿는 일과 비슷하다. 상처는 우리에게 조심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때로는 세상의 크기를 상처가 있던 자리만큼으로 줄여 놓기도 한다.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기대는 일이 가능하다. 오래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맡기거나, 늦은 오후의 벽에 어깨를 붙이고 서 있거나, 창가에 앉아 유리 너머의 나무를 바라보는 일. 그런 순간에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내가 왜 지쳤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사물은 나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를 심문하지 않는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언제나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침묵은 이해의 부재가 아니라 이해를 요구받지 않는 자유에 가깝다.


그때 알게 된다. 내가 바랐던 것은 누군가가 내 삶을 대신 들어 주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내가 잃어버린 것을 되돌려 주거나, 앞으로의 고통을 미리 없애 주는 사람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잠시 힘을 풀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잠시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내가 나를 지탱하지 않는 순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너무 단순해서 오랫동안 믿지 못했던 사실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몸으로 아파할 수는 없고,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바꿀 수도 없다. 각자에게는 끝내 혼자 건너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혼자 건너야 한다는 것과 아무도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니다. 누군가가 강을 건너는 동안 강가에 서 있는 일, 건너편에 도착할 때까지 불을 켜 두는 일,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리를 내어 주는 일. 대신 건너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시간이 완전히 홀로인 것은 아니게 할 수 있다.


어쩌면 사랑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무게를 없애 주는 일이 아니라, 그 무게가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 아님을 알려 주는 일. 누구나 저마다의 몸으로 삶을 견디지만, 그 몸이 언제나 혼자만의 힘으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 주는 일. 사랑은 때로 거창한 약속보다 작은 움직임에 가깝다. 상대가 지친 것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늦추는 일, 설명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는 일, 기댄 사람의 몸이 편안해질 때까지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일.


그런 일들은 기록되지 않는다. 누가 더 오래 기다렸는지,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 누가 누구의 무게를 얼마나 감당했는지 정확히 셀 수 없다. 그래서 관계의 많은 부분은 증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그러나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끝내 문서로 남길 수 없는 도움들이 있었을 것이다. 무심히 건넨 의자 하나, 대답을 요구하지 않던 저녁,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딜 수 있었던 몇 번의 밤. 그 순간들은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많은 무게를 나누어 들고 있었는지 알려 준다.


오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서 있다. 누군가는 등을 곧게 펴고, 누군가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누군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벽에 어깨를 기댄다. 겉으로 드러난 자세만으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몸에도 내려놓지 못한 무게가 있고, 고개를 숙인 사람의 안쪽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누군가의 기울어진 자세를 보고 그가 약해졌다고 단정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힘을 처음으로 조금 풀어 보는 중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벽에 등을 기대면 벽은 내 몸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벽이 나를 대신해 살아 주는 것은 아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야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시 일어서기 전까지 모든 힘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시 기대어 있었다고 해서 내가 서 있던 시간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며, 누군가에게 무게를 맡겼다고 해서 그 무게가 더는 나의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는 안다. 나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면, 그 무게를 언제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믿음까지 지킬 필요는 없다는 것을.


사람은 평생 자신의 무게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을 완전히 내려놓는 날은 어쩌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게를 가진 채로도 기댈 수 있고, 기대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다. 어떤 날에는 누군가의 어깨에, 어떤 날에는 오래된 의자의 등받이에, 또 어떤 날에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벽에.


그리고 충분히 쉬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다시 몸을 일으킨다.

이번에는 혼자 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기대어도 끝내 자신의 두 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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