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은 정말 검정일까

색이 이름을 잃어버린 자리

by구시안
구시안 블랙.png


검정은 모든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태어나는 색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래 바라본 검정에는 이상할 만큼 많은 것들이 잠겨 있다.

새벽이 오기 직전의 창문, 불을 끈 방의 벽, 오래 입어 윤기가 닳아버린 검은 셔츠, 비를 머금은 아스팔트. 같은 검정이라 불리지만 어느 하나 같은 검정을 품고 있지 않다. 어떤 것은 푸르고, 어떤 것은 갈색이며, 어떤 것은 보랏빛의 얇은 막을 숨기고 있다. 빛이 조금만 기울어도 검정은 제 안에 감춰둔 다른 얼굴을 잠깐씩 내민다.


검정은 색이 아니라 어쩌면 색을 감추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가장 어두운 곳을 오래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는 순간,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윤곽이 하나씩 떠오른다. 창밖의 나뭇가지가 보이고, 먼 건물의 지붕이 보이고, 유리창에 희미하게 겹친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어둠은 아무것도 지우지 않는다.

다만 너무 가까이 있던 것들의 이름을 잠시 빼앗아갈 뿐이다.


기억도 그러했다.

지나간 날들은 처음에는 선명했다.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기억할 수 있었고, 손등에 닿던 체온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얼굴의 윤곽이 먼저 흐려지고, 그다음에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이름조차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라진 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을 잃은 기억들이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검정이 되었다.

검정은 망각의 색이 아니라 기억이 더 이상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할 때 남는 색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검정은 오래 바라볼수록 깊어진다.


깊다는 것은 어둡다는 뜻과 다르다.

바다의 깊은 곳이 검은 이유는 빛이 닿지 않아서만이 아니다. 그곳에는 수면 위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라앉은 배의 잔해와 이름 모를 생명과 오래된 모래의 층, 인간의 시간이 닿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침묵.


깊은 것은 언제나 어둡게 보인다.

그러나 어둠과 깊이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검정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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