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맹(色盲)
세계가 돌연 채도를 지워버린 아침을 기억한다.
그것은 눈꺼풀을 무겁게 짓이기며 찾아온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빛은 여전히 방 안의 커튼 틈새를 기어 들어와 벽지를 적셨으나, 그 속에서 모든 ‘이름’들이 도망치고 없었다. 사과가 품었던 붉은 기원은 바래어 잿빛의 침묵으로 남았고, 가로수가 자랑하던 초록의 서사 역시 단조로운 회색의 결로 짓이겨졌다. 세상은 거대한 모노톤의 유령도시처럼 낯설고도 적막하게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인간은 흔히 시각을 통해 세계를 소유한다고 믿는다.
붉은 노을을 보며 감탄하고, 푸른 바다를 건너며 자유를 꿈꾸듯, 우리의 정서와 언어는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의 스펙트럼 위에 위태롭게 지어진 집과 같다. 그러나 그 집의 기둥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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