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 달콤함의 온도

당신이 삼킨 그 달콤함의 온도

by구시안

사방이 온통 백색의 결빙으로 뒤덮인 설탕의 제국에서 우리는 매일 숨을 쉰다.

공기 대신 미세한 당분이 폐부로 스며들고, 입안을 헹궈내려 물을 마셔도 목구멍 끝에는 진득한 시럽의 잔여물이 지문처럼 묻어난다. 세상은 언제나 가장 부드럽고 무해한 미소를 지은 채 우리에게 속삭인다. 조금 더 달콤해지라고, 이 사탕발림의 성벽 안에서는 모서리에 베일 일도, 뼈가 시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조금 높이 더 올라가라고. 그러나 그 무균의 달콤함이 지배하는 허기 속에서, 나는 도리어 혀끝이 아려오는 지독한 설움과 마주한다.


가장 깊은 고통은 단맛이 결핍되어서가 아니라, 달콤함이 과잉된 세계에서 고독을 느끼는 데서 온다.

타인들은 저마다 입에 잰 듯한 친절과 감언이성을 물고 거리를 활보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서로의 비위를 설탕 코팅으로 덧씌우기에 바쁘다. 그 유혹의 기조 속에서 진짜 날것의 감정이나 씁쓸한 진실은 시시하고 불순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나는 그 거대한 당화(糖化)의 흐름 속에서 홀로 쓴 물을 삼키며, 왜 이 달콤한 공기가 지독한 질식으로 다가오는지 설명할 길 없어 속으로만 삭인다.


단단한 뼈를 발라내고 부드러운 살점만을 발효시켜 만든 세상에서, 온전한 아픔을 겪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것 같은 소외감이 가슴을 조여 온다.


인간이 견뎌야 하는 진짜 삶이란 언제나 쓴 뿌리를 씹어내는 일과 닮아 있다.

흙냄새 섞인 뿌리를 씹으며 돋아나는 생명력은 설탕의 가짜 온기로는 대체할 수 없는 서늘한 진실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온통 영혼마저 절여버릴 기세로 삼라만상을 당밀 속에 가두려 든다. 슬픔을 슬픔으로 두지 않고 즉각적인 위로의 당분으로 메우려 할 때, 우리의 내면은 속이 텅 빈 방부 처리된 과일처럼 변해간다. 단단하게 굳어지거나 썩어 문드러질 자유마저 빼앗긴 채, 오직 녹아내리기만을 강요당하는 삶은 그 자체로 거대한 형벌이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뉴스와 거리에 걸린 간판들은 하나같이 혀를 녹이는 감언이설로 채색되어 있다.

실패는 없으며 오직 달콤한 성공의 보상만이 기다린다는 맹목적인 구호 속에서, 사람들은 진짜 눈물을 흘리는 법을 망각한 채 당밀에 절인 인형처럼 걸어 다닌다. 거대한 자본과 쾌락이 설계한 이 거대한 유혹의 미로는 가난한 자에게는 위로의 이름으로, 부유한 자에게는 오만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설탕물을 주입한다. 그러나 그 달콤한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찾아오는 것은 영혼의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듯한 지독한 허탈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가난이나 추위가 아니라, 아무런 저항 없이 단맛에 길들여져 마침내 스스로 썩어 문드러지는 줄도 모르는 무감각이다.


씁쓸함을 잃어버린 생명은 더 이상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아픔을 모르는 마음은 타인의 상처를 짐작하는 법조차 잊어버린다. 내가 이 찬란한 설탕의 제국 구석에서 굳이 쓴 기억들을 소금에 절이듯 품고 살아가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세상이 온통 흰 가루로 눈이 멀어버린 시대에, 홀로 거친 대지를 디디며 혀끝에 남은 쓴 생명의 결을 확인하는 일만이 이 끈적한 유혹 속에서 인간의 온전한 형상을 지키는 유일한 방편이 된다.


그러므로 이 달콤한 폭력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혀끝의 감각을 거스르는 일이다.

설탕의 홍수 속에서 홀로 쓴 사과를 깨물고, 혀가 아리도록 저릿한 진실의 바닥을 더듬는 것. 세상이 건네는 유혹의 잔을 밀어내고 이마를 벽에 부딪치며 느끼는 생생한 통증만이, 내가 아직 당분에 절여지지 않은 살아있는 인간임을 증명한다. 세상이 온통 흰 설탕으로 눈이 멀어갈 때, 나직하게 쓴맛을 품고 서 있는 그늘만이 이 건조하고 끈적한 유혹의 제국에서 영혼을 구원할 유일한 밀도가 된다.



이기주 작가에게 매우 큰 실망을 보내며.

달콤함에 관한 불온한 온도의 기록을 남긴 당신에게.

구시안드림.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