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고독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by이화윤 lee hwayoon





학창 시절에 내 옆에 슬롯적 불안증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앉은 나에게는 무엇인가 불안하고 초조한 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 어려움을 겪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시절에 영향을 미쳤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고, 특이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 아이에 대해 나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와 관련된 바카라이나 글도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불안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힘들었겠구나.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그의 소식을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때쯤 나도 비슷한 어둠 속에 있었다. 힘들었다. 다 포기하고 싶었다. 미래는 어둠이었다.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의미 없는 생을 버티며 사는 게 너무나 가벼워 보였다.


겉으로는 완전한 체하지만, 그 속에는 불안과 흔들림과 나약함이 숨어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아이는 산다는 게 시니컬해지고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혼자서만. 밖으로는 한없이 착하고 온화한 아이였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혼자만의 고독이랄까. 꽤 잘 숨겼다. 상 받아도 될 정도로.



대학에 와서도 그건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라는 감각.


고등학교 때 죽는 쪽을 생각한 적이 있다. 위험한 생각이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대학에 와서는 그 생각을 덜 하게 됐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됐다.


그런데 우울한 폼은 버리지 못했다. 불안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았기에.


수염을 자주 안 깎았다. 스무 살 얼굴에 수염이 어울릴 리 없다. 기른 게 아니라 내버려 둔 거였다. 거기에 낡은 외투까지 입고 다녔다. 남들 눈엔 그냥 안 씻은 애였을 거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은데, 그때는 그게 나였다.


가방에는 칸트나 쇼펜하우어, 맹자, 노자, 반야심경 등이 들어 있었다. 가끔 바이블이나 인도 서적도 읽었다. 무엇인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생각나는 대로 읽었다.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다. 한 쪽 읽고, 다음 날 같은 쪽을 또 펼쳐도 와닿지 않았다. 질문만 많아졌다. 마음을 속시원히 풀어줄 해답은 없었다.


그래도 못 덮었다. 세상에 뜻이라는 게 있으면 어느 바카라엔가 적혀 있을 줄 알았다. 그걸 못 찾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가 대학 신입생 시절이다. 교양으로 독일어를 들었다. 인생의 의미는 못 찾고 강의가 끝나면 막걸리 집으로 다닐 때였다. 젊은 독일어 교수가 과제를 하나 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해 써보라는 거였다.


제목에 '슬픔'이 들어 있었다.


베르테르는 사랑하지 않아야 할 여자를 사랑했다.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그 죽음에 대해 리포트를 썼다. 뭘 썼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어딘가의 낡은 서랍 속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치기 어린 글이었을 것이다. 조금 길었다. 그걸 거의 고치지도 않고 써서 냈다.


생각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것만으로 다행이었다.


그 교수는 학보를 맡고 있었다. 교정할 데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분은 나를 불러서 대학 신문에 싣겠다고 했다. 내 의사를 물어보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귀부터 뜨거워졌다. 부족한 글을 공개한다는 게 어색했다. 그러나 아니라고는 못 했다. 솔직히 나쁘지는 않았다. 잘 쓴 것도 아닌 글을 좋게 바라봐 주는 한 사람의 존재가 내게 다가왔다. 내 글을 처음으로 의미 있게 읽어준 사람이었다.



신문에 내 글이 실렸다. 몇 번을 다시 봤다. 내 글이 맞았다. 활자가 좀 예뻐 보였다.


뭐야. 친구들이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빈말이라도 고마웠다.

그날은 수염 기른 게 좀 덜 멋쩍어 보였다.


원래 계획은 따로 있었다. 졸업하면 안정된 온라인 게임에 들어가는 거였다. 세상도 불안했고, 나는 더 불안했다. 지독한 어둠 같은 불안이 싫어서 세운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가을 이후로 계획이 몽땅 흔들렸다.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꿈이 생겼다. 생각도 안 해 본 길이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이다. 철학바카라을 한 학기 내내 들고 다녀도 못 찾은 걸, 리포트 하나를 신문에 실어준 데서 바뀔 수도 있다니. 지금도 그 시절 읽은 바카라들을 좋아하고 존중한다. 다만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답은 바카라 속이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찾는 거였다. 진지한 체하는 사람들 속의 흔들림을 많이 봐와서 얻은 결론이다.


나의 부족한 글을 읽어준 그분이 없었으면 나는 처음 계획대로 안정된 온라인 게임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거다. 그게 더 나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 수 없다는 게 가끔 불안하다. 적어도 수염은 일찍 깎고 온라인 게임 생활을 했겠지.


한 사람의 관심과 사랑이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분은 아마 나를 잊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그 뒤로도 어두운 시기는 가끔 예기치 않을 때 밀려왔다. 그때마다 한 줄이라도 써 보려 했다. 한 줄도 못 쓴 밤이 더 많았다. 그래도 생각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그 밤을 어떻게 버틸지 몰랐다.


가끔 그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도 뭔가를 놓지 못하고 살았을 거다. 나도 생각을 놓지 못하고 산다. 다른 불안인데, 놓지 못한다는 건 같았다.


사람이란 존재는 불완전하고, 나약하다. 순간에 무너진다. 이해관계 속에서 불편해지고 비교하고 갈등한다. 때로는 긴장하며, 아프게 살아간다.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불편한 사람. 그럴 때도 모른 체 넘어간다. 그 불완전성마저 이해하려 한다. 조금은 심술궂거나 나쁜 심성을 가져도 악의적이지만 않다면 그가 좋은 방향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기대하면서.


나만 바라보기보다는 상대를 바라보고, 이곳만 바라보기보다는 저 멀리도 바라보게 됐다. 그 변화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불안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사람은 대개 편한 곳을 찾아간다. 그게 맞다. 나는 지독한 불안에서 겨우 빠져나와서, 그보다 더 지독한 불안 속으로 떠났다.


올해도 가을이 왔다. 수염이 자란 치기 어린 사내아이가 생각난다. 아프고 슬픈데 왜 그때가 그리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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