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발리 와야 할 운명이었나 봐

by하르딘

발리로 가는 항공권은 올해 3월 즈음에 샀다. 여행 시기인 10월까지는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보였다. 처음엔 빨리 10월이 왔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날짜가 가까워져 올수록 조금 의욕이 떨어졌다. 안 그래도 올해는 뭔가 계속 피곤한데, 피곤할게 분명할 여행을 꼭 가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내년에는 멕시코에 꼭 가고 싶은데 멕시코 여행은 경비가 많이 들 것 같아서 발리 여행경비도 좀 부담이 됐다. 그래서 두 달 전쯤엔 발리 여행을 취소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또 올해 해외여행을 한 번도 못 간지라 한편으론 기대되기도 했다. 이렇게 계속 기대하다가 귀찮아하다가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던 중, 정신 차려보니 비행기 안이었다.

첫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술집들의 시끄러운 음악소리, 거리의 수많은 오토바이 소리, 담배 냄새, 각종 음식 냄새, 습한 공기, 길거리 떠돌이 강아지들의 모습, 이렇게 오감이 정신없는 풍경을 마주 보고 있는 나 자신이 좀 낯설었다. 주변 풍경만 바뀌었을 뿐, 나는 나 자신 그대로였으므로. 영화처럼 일상과 180도 다른 새로운 풍경에 있다고 해서 꼭 새롭고 신기한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사실 여행지에서도 일상에서처럼 먹고 자고 싸고 해야 하는 건 똑같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호텔 근처의 식당으로 걸어갔다.

발리에서의 첫 끼는 웃기게도 인도 음식이었다. 우리 동네에 인도 음식점이 있는데 너무너무 비싸서 딱 한 번 가봤다. 여기서는 좀 더 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먹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먹고 싶은 거 다 시켰다, 남기더라도 이것저것 먹어보고 싶었으므로. 거의 2~3인분 시킨 것 같다. 배부르게 먹고 나와서 후식으로 젤라또를 사 들고 그냥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가 문득 갑자기 멈칫했다. 그냥 평범한 거리 풍경이었는데. '어? 나 이 장면 본 적 있는데..?' 하는 느낌이 들었다. 데자뷔였다. 분명 처음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살면서 몇 번 느껴보긴 했지만, 아주 오랜만이라 신기했다.

그런데, 첫 데자뷔 이후 한 2,3일 후에 또 데자뷔를 느꼈다. 시장 구경하고 카페 걸어가는 길의 들판에서였던 것 같다. 그냥 진짜 별거 없는 평범한 발리의 풍경이었다. 정말 어이없게도 그러부터 또 며칠 후 또 한 번 데자뷔가 느껴졌다. 새벽에 일찍 눈이 떠져서 스쿠터 타고 근처 뷰포인트 좋은 바닷가에 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5시 반경 바닷가 쪽 작은 마을이었다. 파도가 철석이는 소리만 들렸는데, 너무 강렬하게 본 적 있다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 광경이 너무 묘하고 신기했다.

세 번의 내 데자뷔 장면 속에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냥 어떠한 풍경이나 장면 같은 것이었다. 데자뷔 속에서도 나는 혼자 여행했었나 보다. 어쨌든. 9일 동안 무려 3번이나 데자뷔를 느끼고 나니까, 혹시 내가 발리에 잠깐이라도 온 적이 있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100% 확실하게 나는 발리에 이번이 처음 와봤다.

평소에 한국에서도 데자뷔를 느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자주는 없다. 여행지에서 데자뷔를 느낀 적도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곳 발리에서 겨우 9일 동안 3번이나 데자뷔를 느끼다니..! 처음인데도 편하고 좋았던 건 그래서였을까.

한번 여행한 곳은 웬만하면 또 가지 않는 내가, 한 번 본 영화는 웬만하면 또 보지 않는 내가, 발리에서는 여행을 하면서 여기 나중에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발리 여행 취소 안 하길 정말 잘했다. 나 발리 꼭 혼자 왔어야 할 운명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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