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엌에 서다
창밖으로 눈이 예쁘게 내리던 날이었다.
이상 소견이 더 보인다는 말에 조직 검사를 위해 입원을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자는 동안에도 마스크를 써야 하는 답답함 속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대비를 했다. 통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것을 대비해 생수통에 미리 빨대를 꽂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두고, 검사 후 돌아와 바로 누울 수 있게 이불을 정리해 두는 등.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방어선을 세워두었다.
검사를 마친 후 회복 시간을 거쳐 링거대를 끌고 화장실로 향하던 길,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환자가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다정한 모녀의 모습에, 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하늘로 가신 엄마의 얼굴, 그리고 엄마의 병간호를 하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애써 세워두었던 마음의 둑이 무너지며, 링거대에 기대어 참아왔던 두려움과 서러움을 시원하게 쏟아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더 이상의 나쁜 결과는 없었고 예정된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 당일, 곁을 지켜준 오빠는 수술실에 들어가려면 머리를 땋아야 한다는 말에 서툰 솜씨로 내 머리를 정성스레 땋아주었다. 그런 오빠가 고마워 함께 이야기하고 웃기도 했지만, 휠체어를 타고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선 순간, 생수통에 빨대까지 미리 꽂아두며 버티던 씩씩함은 어디 가고 혼자가 된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차가운 수술대 위, 마취과 의사의 질문에 답하며 하나, 둘, 셋을 새어나가던 기억을 끝으로 나의 의식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살아야 했다. 아니, 어떻게든 잘 살아내고 싶었다.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 억지로 물을 삼키고, 링거를 꽂은 채로 매일 병원 옥상을 몇 바퀴씩 쉼 없이 걸었다. 퇴원 후에는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코로나로 외출이라곤 하루 한두 시간만허용 되었고, 명부를 작성하고 근처를 산바카라하는 것이 외출의 전부인 일상이었다. 때가 되면 내 몸 상태에 맞춘 심심하고 미지근한 식사가 하얀 쟁반에 담겨 나왔다. 끼니를 챙겨야 하는 수고로움 없이 주는 대로 먹기만 하면 되는 건 분명 편했지만, 그 무채색의 규칙적인 식사 속에서, 내 몸속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에 대해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먹는 일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삶의 기쁨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건강하고 내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 내 몸과 마음에 위로를 줄 수 있는 따뜻한 요리를 온전히 내 손으로 지어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나는 단조로운 병실에 앉아 식재료와 요리에 관한 바카라들을 파고들었다. 병원 생활을 하며 머릿속으로 나만의 식탁을 그리는 일.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아픔을 이겨내고 반드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병원을 떠나 나의 집, 나의 일상으로 돌아온 날. 나는 텅 빈 부엌에 서서 묵직하고 까만 프라이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내어주던 흰 쟁반 위 미지근한 음식에서 벗어나, 기름을 두르고 펄펄 끓는 뜨거운 열기를 더해야만 살아나는 그 거칠고 까만 쇳덩어리가 필요했다.
불을 켜고, 둥글고 단단한 양파를 서걱서걱 썰어 달궈진 팬 위에 올렸다. 뜨거운 쇠와 뽀얀 양파가 맞닿으며 '치익-' 하는 경쾌한 소리가 가라앉았던 집 안의 적막을 깨트렸다. 뜨거운 열기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증기, 온 집안을 채우는 달큼하고 구수한 양파 볶는 냄새. 그 생동감 넘치는 주방의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는 순간, 비로소 내가 나의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갑작스레 나를 덮쳐왔던 병과 막막했던 두려움, 혼자 감당해야 했던 수술과 회복이라는 길고 차가운 터널을 지나, 지금 이 순간 부엌에 서서 프라이팬 손잡이를 쥐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더 이상 병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 삶을 내 힘으로 요리해 나가겠다는 강인한 마음이 이미 내 안에 가득했다.
그렇게 나는 울며 무너져 내리는 대신, 프라이팬을 들었다.
텅 빈 부엌이 달큼한 양파 볶는 냄새와 따뜻한 온기로 채워지는 동안, 나의 시간도 다시금 맛있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먹이고, 살리며, 사랑하게 될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