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입니다 (프롤로그)

삶을 멈춰 세운 한 마디

by진정
"암입니다"라고 했는지, 아니면 "악성입니다"
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던 나에게 그 단어를 건네던 의사의 얼굴 위로 옅은 안타까움 같은 것이 잠시 스쳐 지나갔던 것만 희미하게 기억날 뿐이다.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그 단어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나는 어쩔 수 없이 무너지는 마음과는 반대로 단단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곳에서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행여나 그런 마음을 들킬까 봐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괜찮은 표정을 해 보였다. 그것은 무거운 소식을 전하며 주저하던 의사의 배려 섞인 표정에 대한, 무의식적인 화답이기도 했다.


타인의 감정을 먼저 살피는 습관은 몸에 배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에도
내 슬픔을 스스로 건조하게 억눌렀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와 복도 구석진 벽에 몸을 숨기듯 기대었다. 발밑의 차가운 병원 타일 위로 소리 없는 눈물이 툭, 떨어져 번졌다. 시야는 눈물로 일그러졌지만, 두 손은 행여나 방금 발급받은 서류 한 장이라도 구겨질세라 파일의 모서리를 반듯하게 맞춰 쥐고 있었다. 발걸음은 접수처 창구로 향했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음 진료 예약을 꼼꼼히 잡았다. 옷을 여미며 병원 문을 나서는 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집으로 가는 버스가 몇 분 뒤에 도착하는지 화면을 무심히 쓸어내렸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오빠였다. 액정에 뜬 이름을 내려다보며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단어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담담한 척 결과를 묻는 오빠의 목소리에, 조금 전 복도 구석에서 홀로 삼켰던 그 단어를 기어이 뱉어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내 조용히 들려온 오빠의 다정한 말들에 기대어,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어둠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돌아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냉장고 문을 여는 것이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마주해야 할 길고 험난한 터널을 통과하려면, 그동안의 식생활에서 벗어나 내 몸에 병을 이겨낼 힘을 줄 건강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의 직감이었던 것 같다. 거창한 요리를 할 기력은 없었기에, 냉장고 안에서 그나마 가장 맑고 깨끗해 보이는 식재료들을 꺼내어 조용히 끼니를 차렸다.


식사를 마치고 불도 켜지 않은 방,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주저앉았다. 익숙한 방 안의 공기와 가라앉은 적막. 무릎 앞에 반듯하게 놓인 서류 봉투의 서늘한 질감만이 이 모든 것이 악몽이 아님을 일러주고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살아내기 위해, 이 텅 빈 부엌에서
매일의 식탁을 정성껏 차려내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생존을 위해 시작된 나의 부엌 생활은 얼어붙었던 마음을 천천히 덥혀주었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은 절망적인 순간 나를 살려낸, 작지만 위대한 나의 식탁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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