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 28. 피렌체의 둘째날 ①
전날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문자 그대로 까무룩 쓰러졌습니다.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나봅니다. 그러다보니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전날밤 일기를 쓰게 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도 다음 날 아침의 자리에 전날밤의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어제는 술을 마셔서 동선이 꼬였다는 징표로만 짤막하게 등장했던 산타 크로체 성당과 레푸블리카 광장을 다시 돌아보고 싶거든요.
산타 크로체 성당. 사실 여기는 앞을 스쳤을 때의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습니다. 신났던 기억입니다. "와, 동선과 일정 문제로 계획에 못 넣었었는데, 이렇게 그 앞이나마 지나치네!" 하는 스스로의 그 해맑은 순간 하나가 기억에 남아요. 아마 가이드북에서 읽고서 가보고 싶어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정작 저기에 왜 가고 싶어했는지는 한참을 잊고 있었다가, 지금에야 그 이유를 다시 깨닫습니다.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같은 역사의 거인들이 묻힌 곳. 리소르지멘토 곧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초석이 되었던 여러 위인들이 묻힌 곳. 단테의 가묘와 동상이 있는 곳. 스물셋의 초보여행자로서는 무척이나 궁금해할만한 공간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지금에야 영웅사관에 대한 삐딱한 생각부터 들지만요. 왜 그 역사를 진정으로 지은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는지요?
한편, 그렇듯 민족적 영웅들이 모여 있어서인지 이탈리아의 팡테옹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더군요. 물론 조금 우스꽝스러운 별명이기도 합니다. 아마 프랑스의 팡테옹을 빗대 그런 별명을 붙인 것 같은데, 사실 이탈리아의 영원한 수도 로마에는 그 팡테옹의 원조가 된 진짜 판테온이 있단 말이지요. 제가 못 들어갔던 그 판테온 말입니다... 그나저나 저는 로마의 판테온도, 이탈리아의 팡테옹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만 스쳤군요. 과연 프랑스의 팡테옹에는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한편, 그 밤에 그 앞을 지났다는 기억 자체가 없는 곳... 그리고 사진조차 잔뜩 흔들려 뿌옇게 남은 곳, 곧 레푸블리카 광장은 그 리소르지멘토가 끝내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완결되는 순간에 그 이름을 다시 얻은 광장입니다. 19세기의 리소르지멘토는 왕국 이탈리아를 세우는 데에서 멈췄었지만, 그 왕정이 파시즘과 결탁해 타락했다가 몰락해버리면서, 통일 이탈리아는 마침내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지요. 바로 그 순간, 저 회전목마의 광장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라는 왕의 이름을 내던지고, 레푸블리카 곧 공화국의 이름을 갖게 됩니다.
지금 보면 참 신기합니다. 저 광장을 하루에 세 번을 지났는데, 어떻게 그 이름 레푸블리카에 담긴 의미를 고민해볼 생각은 한 번을 못했을까요? 저처럼 공화국에 대한 열망과 애정으로 가득한 사람이! 혹시 그저 반짝이는 회전목마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에 홀려서 다른 생각을 못한 걸까요? 아쉽게도, 스물여섯의 저는 그 회전목마를 바로 눈앞에 두지는 않았고, 해서 이 광장을 회전목마의 광장이 아닌 레푸블리카 광장으로 기억할 수 있기에, 이번에는 공화국을 노래해보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글의 주제는 공화국입니다. 이제 그 주제 위에서 춤을 출 이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이튿날 아침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튿날 숙소 문을 나서며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연 시각, 아침 8시 10분. 언제나 하루를 꽉 채워다니려고 노력하는 배낭여행객에게는 그렇게 이른 시각이 아니지만, 그렇듯 전날도 하루를 꽉 채우려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들어왔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나 이른 시각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스물셋은 그런 생각할 정신이라고는 없습니다. 늦었거든요. 물론 8시 30분이 미팅 시간이고, 숙소에서 미팅 장소인 베키오 궁까지가 대략 15분 거리라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대바카라 없이 늦은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늦지 않기 위해서 아침도 거르고 적당히 옷 꿰어입고 달려가는 중인 탓이기도 하지요. 한데,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직 희미한 햇빛이 감싸져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모습만은 놓치기 싫었나 봐요. 사진 하나를 남겨뒀습니다. 미팅 시작이 고작 10분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물론 저로서는 기껍습니다. 또 다시 경탄스러운 아름다움 하나를 포착할 수 있었으니까요. 스물셋이 적당히 찍어놓은 사진들에 이처럼 스물여섯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스물셋은 늦지 않게 시뇨리아 광장 한켠에 자리한 베키오 궁의 문에 닿았습니다. 그러고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가이드 분을 따라 우피치 미술관 입구 쪽으로 향합니다. 이제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가이드 분의 설명을 따라가겠지요. 실제로, 사람으로 가득했던 바티칸 미술관과 달리, 우피치 미술관은 그래도 꽤나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가이드 투어에 참여한 인원도 다섯 뿐이라 가이드 분을 따라다니기에 어려움도 없었고요.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잠시 스물여섯의 여정을 앞세워야 하겠습니다. 스물셋이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그러나 스물여섯에게는 깊게 남는 순간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시간을 되감아 베키오 궁의 문 앞으로 가보겠습니다.
스물셋이 베키오 궁의 문을 찍어놓은 것은, 물론 그곳이 베키오 궁의 문이어서도 있겠고, 방금 가이드 분과의 접촉을 마친 후 한숨을 돌리던 차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실 그보다도 그 유명한 다비드 상이 그 앞에 서 있는 때문이 클겁니다. 계획에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넣어놓지 않았기에, 이렇게 복제품이라도 기억에 남기고 싶었을 테지요. 그러나 스물여섯은, 다비드 상 하나만이 아니라, 사진 귀퉁이에 간신히 나온 헤라클레스 상까지도 함께 보게 됩니다. 시뇨리아 광장에 그 각각의 상을 세운 주체가 서로 같으면서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비드 상을 세운 공화정, 그리고 헤라클레스 상을 세운 군주정. 그리고 둘 모두를 세운 피렌체의 사람들.
시간을 다시 앞으로 감아 봅시다. 이번에는 베키오 궁과 우피치 미술관을 잇는 작은 구름다리입니다. 그 당시, 베키오 궁 앞에서 우피치 미술관 쪽으로 걸어가면서, 가이드 분께서 저것은 고위 인사들이 사용하던 통로라고 해주셨던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 구름다리가 저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번에는 우피치 미술관을 반 정도 돌아본 후, 남단의 창가에서 찍은 베키오 다리입니다. 생각해보니 어제 베키오 다리 위의 낭만을 그토록 노래했으면서, 정작 모두에게 그나마 익숙할 베키오 다리의 전경은 남기지 않았군요. 아무튼 저렇듯 다리 위에 각종 상점과 건물이 늘어서 있는 것으로 유명한 저 '가장 오래된 다리'에도 사실 아까 그 구름다리가 이어져 있습니다. 베키오 궁에서 시작해 우피치를 지나 베키오 다리의 2층을 지나 피티 궁까지 이어지는 이 구름다리. 혹은 그 회랑.
그 회랑 위에 살았던 이들의 이름이 바로 메디치입니다. 피렌체를 단지 아름다운 르네상스의 도시, 붉은 빛의 도시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면,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숨쉰 노란 빛의 역사를 들여다보려고 한다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그 이름, 메디치 말입니다.
시계를 뒤로 거세게 돌려, 제가 태어났을 때보다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그렇게 도착한, 1478년의 어느 주일. 장소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미사 도중 어느 성직자 두 명이, 도시를 지배하던 형제 두 명에게 칼을 휘두릅니다. 그와 함께 쏟아진 수많은 이들의 날카로운 칼날 아래, 동생은 죽음을 맞고 형만이 간신히 도망칩니다. 이 혼란 속에서, 살해자들의 배후가 등장해 외칩니다. "민중, 그리고 자유!" 그러나, 정작 민중들은 냉랭합니다. 오히려 그 민중들은 두 형제를 위해 끓어오릅니다. 그들은 음모를 꾸민 이들을 짓밟아버리고, 살아남은 형, 로렌초 일 마니피코를 더욱 탄탄한 권좌 위에 올립니다.
그렇게 로렌초는 위기 속에 더 큰 기회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 위에서, 그는 민중을 권력에서 소외시키는 개혁을 일궈냅니다. 사실상 도시의 권력 전체를 메디치의 손아귀에 집어넣어버리는 그런 개혁. 그렇습니다.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는 그라쿠스 형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호민관이 아닌 독재자였습니다. 그렇듯, 공화국이라는 이름 위에 세습되는 독재권력이라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 공화국도 그 독재권력도 다름 아닌 민중의 열광과 환호 위에서 지속되었다는 아이러니.
하지만, 그런 아이러니를 섣불리 풀어헤치려들면 무언가에 걸려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찬찬히 조금 더 걸어볼까요? 우피치의 회랑을 따라서.
우피치의 작품들을 찬찬히 감상하다 보면, 메디치의 얼굴들을 적잖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개중 또 다른 한 명의 초상을 제가 찍어놨더군요. 이 사람의 이름은 코시모 일 베키오. 바로 이 인물에 의해서, 그 전까지는 공화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가문 중 하나에 불과했던 메디치가, 공화국 위에 군림하게 됩니다. 그 권좌로의 길을 예비한 것은, 끝까지 공화국의 공직을 거절하며 얻은 평판과, 은행업을 통해 일궈낸 자금력 그리고 당대 주요 가문들을 혼약과 자금으로 엮어낸 복잡하고도 끈끈한 연결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끝내 권좌에 앉히고 끌어내린 최종 심급은 다른 무엇도 아닌 민중의 손이었습니다. 그의 손자인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그랬듯, 광장에서의 집회를 통해 메디치에 의한 지배가 승인되었고, 또 위기 때마다 갱신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광장에서의 집회는 항상 메디치 가가 동원한 무장 병력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광장에서의 집회를 통해 승인된 것은 메디치에 의한 선거조작이었고요. 그렇다면 그 광장에서의 집회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민중은 메디치에게 강제당한 걸까요? 놀아난 걸까요? 혹은 그 모든 강제와 기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그들의 손으로 메디치를 들어올린 걸까요? 피렌체인들이 지은 공화국은 그저 허상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당대에 가장 멀리 나아간 무언가였을까요?
이 모든 질문들도, 가슴 속에 품기만 한 채 뒤를 돌아 걸어나옵니다.
다시 우피치의 회랑입니다. 수많은 이들의 흉상이 보이는군요. 한 명 한 명이, 분명 어떤 역사적 영웅일 것입니다. 산타 크로체 성당이 통일 이탈리아의 팡테옹이었다면, 이곳은 메디치 가가 지어올린 피렌체를 위한 팡테옹이려나요? 그런 추측 뒤에서, 아까 잠시 우스갯소리처럼 접어뒀던 질문을 다시 꺼내듭니다. 왜 그 역사를 진정으로 지은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는지요? 로렌초 일 마니피코를 살려낸 것도, 코시모 일 베키오를 권좌에 앉힌 것도, 모두 민중이었는데, 우피치에 인자한 로렌초의 얼굴과 입을 굳게 다문 코시모의 얼굴은 있지만, 그들을 일으키고 쫓아낸 민중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메디치가 피렌체의 공화정을 베어버리기 위해 준비한 가장 예리한 칼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화국의 노래 위에 메디치들만이 춤추고 있고, 민중의 자리는 조연 아니 배경에 머무르고 있으니, 이 노래는 언젠가 공화국의 노래가 아닌 메디치의 노래로 기억되겠지요. 어떤 칭호도 받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겸손한 자로 위치짓던 코시모 일 베키오가 어느 순간 피렌체의 국부로 기억되게 되었듯.
이제 그 회한까지도 끌어 안은 채, 다시 베키오 다리를 바라봅니다. 1층의 지저분한 상점들과 섞이지 않고 다리를 건너기 위해 2층의 회랑을 지었던 메디치를, 그럼에도 그 회랑 위의 고귀한 메디치에게 기꺼이 갈채를 보내며 그들의 통치를 승인해주었던 민중들을 바라봅니다. 제가 품은 것보다 더 많은 아이러니와 질문들, 그리고 회한을 품고 살았을 민중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