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6.14./14-1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1975)>에서,
권력이 외부의 감시를 벗어나
'그 자체로 철저히 닫힌 공간(un lieu fermé sur lui-même)'을 형성할 때
일어나는 병리적 현상을 경고했다.
완벽히 밀실화된 권력 내부의 주체들은 보편적인 현실 감각을 상실하고,
외부와 단절된 그들만의 기괴한 규율에 매몰된다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 선거관리위원회 지역 사무실에서 포착된 '골프 스윙'은,
외부의 견제를 상실한 단절된 권력이 얼마나 기괴하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메타포다.
선거 실무 체제가 붕괴 직전에 놓인 국가적 비상사태 속에서,
제도의 바카라임을 짊어진 자가 한가로이 골프채를 휘두르는 장면은 단순한 태만이나 직무유기를 넘는다.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과 민주주의 제도를 향한 뻔뻔한 '제도적 조롱'이다.
이들의 파렴치함은 공직 슬롯의 기본적 작동 원리마저 짓밟고 있다는 데서 더욱 한심하다.
4년 전 중앙선관위에서 의뢰하여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여전히 올려져 있는)
한국정당학회가 수행한 선거관리제도 개선방안 연구용역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활자가 아니다.
정부에서 수행하는 정바카라연구과제는 필연적으로 착수-, 중간-, 최종 결과보고라는
세 번 이상의 공식적인 검증과 논의 절차를 거친다.
이 엄중한 과정 속에서 현행 동원 체제의 파탄과
행정 마비에 대한 적색경보가 수없이 울렸을 것이다.
<선관위 홈피에 올려져 있는 정바카라연구과제 결과보고서>
https://ok.nec.go.kr/site/nec/ex/bbs/View.do?cbIdx=1132&bcIdx=190090
당시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이미 작금의 파국을 명확한 실증 데이터로 경고했다.
일선 지자체 공무원들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당,
빗발치는 민원 속에서 선거 업무를 보이콧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하부구조를 맨몸으로 지탱하는 말단 실무자들은 과로로 쓰러져가는데,
정작 그 체제를 총괄하고 혁신해야 할 상층부의 권력자들은
철저히 차단된 무균실 안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었던 셈이다.
결과보고서를 현장에 적용하기는커녕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는지조차 심히 의심스러운 이 참담한 대비는,
선관위 수뇌부가 앓고 있는 공감능력의 완전한 상실을 증명한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면피용 보고서나 찍어내며
본연의 임무를 방기한 이들의 행태는 무능을 넘어선 범죄적 태만이다.
선관위는 1960년 3·15 부정선거의 뼈아픈 반성 위에서,
권력의 부당한 개입을 막기 위한 '독립성'이라는 숭고한 헌법적 가치를 부여받고 탄생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그 독립성은
외부의 감시를 차단하고 자신들의 부패와 무능을 은폐하는 두꺼운 철갑 방패로 전락했다.
흔히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검찰을 거론하지만,
선관위의 기만적 타락은 그보다 천만 배는 더 악랄하고 파괴적이다.
광장에서 눈에 띄게 칼을 휘두르던 검찰은 지금 그 대가로 정치권의 매서운 수난과 견제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선관위의 뻔뻔함에 비하면 검찰은 그나마 최소한 직업적 '성실성'은 갖춘 조직이다.
일부 권력을 탐하는 정치검사들이 사법 불신을 초래하고 나라를 어지럽힌 것은 사실이나,
그 이면에는 산더미 같은 사건 기록과 씨름하며
묵묵히 일반 서민의 삶과 정의를 지탱하는 다수의 평검사들이 존재한다.
적어도 그들은 중대한 수사나 재판을 앞두고
내 살길을 찾겠다며 무바카라임하게 사건을 내팽개치고 도망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관위는 어떤가?
국회의원들의 생사여탈권인 선거법 유권해석 권한을 무기로 입법부마저 발밑에 꿇렸고,
친인척 채용 비리 등 1,000건이 넘는 특혜 의혹으로 그들만의 신의 온라인 게임을 구축했다.
심지어 기관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헌신해야 할
국가적 비상사태인 '선거철'에 맞춰 수백 명이 단체 휴직을 감행하며
제도의 바카라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친다.
검찰이 눈에 보이는 야수라면, 선관위는 철저한 익명성과 독립성 뒤에 숨어
민주주의라는 나무의 뿌리를 조용히 썩게 만드는 치명적인 '익명의 독버섯'이다.
이들은 빛이 들지 않는 관료주의의 음습한 장막 뒤에서,
누구도 개별적인 바카라임을 지지 않은 채 포자처럼 번식하며 무바카라임의 카르텔을 유지하고 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며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을 상실한 생각+없음(thoughtlessness)"이
가장 끔찍한 재앙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지금 선관위 사무실에서 허공을 가르는 저 골프 스윙은,
현장의 고통과 제도의 위기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끔찍한 무지와 무바카라임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눈앞에서 번뜩이는 야수의 이빨에는 즉각적으로 공포를 느끼지만,
대들보 속을 파고드는 흰개미의 포식에는 철저히 무감각했다.
겉보기엔 멀쩡했던 아스팔트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싱크홀'처럼,
이번 선관위 사태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감시받지 않는 밀실 안에서 무려 60년 동안 서서히 진행된 도덕의 침식이며,
'위험의 정상화(Normalization of Deviance)'가 만들어낸 예견된 붕괴다.
고백하건대,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선거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극단적인 부정선거론자들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소말리아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이 고도화된 시스템 슬롯에서 벌어질 리 없다는
'합리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합리성의 역설이 문제였다.
반성한다, 이제 정말 제도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비웃는 사이, 정작 우리의 눈을 가린 것은 선관위라는
거대한 관료 조직이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있던 치졸한 '행정적 타락'이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 1887-1948)는
"윤리적인 행동이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심지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합법일 때조차도 올바른 일을 하는 것
(Ethical behavior is doing the right thing when no one else is watching —
even when doing the wrong thing is legal)"이라 역설했다.
선관위는 자신들의 타락을 합법적 독립성으로 포장하려 들지만,
국가 권력은 결코 양심에 기대어 윤리를 실천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도덕을 강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밀실의 벽을 허물어 빛을 들이는 것뿐이다.
이 파렴치한 관료주의적 사이코패스 행태를 더 이상 '독립성 보장'이라는 명분으로 방치할 수 없다.
썩어빠진 기둥을 땜질하는 수준의 미봉바카라으로는 불가능하다.
건전한 상식을 공유하는 국민 대부분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주권자가 직접 감시하고 참여하는 투명하고 수평적인 거버넌스로 선거 관리의 패러다임을
전면 해체하고 재건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가라앉는 배 위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자들에게 계속 맡겨둘 수는 없다.
이제 특권의 방패 뒤에 숨어 의뭉스럽게 뒷짐 지고 앉아있는 자들의 손에서 선거의 열쇠를 회수해야 한다.
그것이 이 지긋지긋한 불행의 고리를 끊어내고, 무너진 제도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출발점이다. 당시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이미 작금의 파국을 명확한 실증 데이터로 경고했다.
일선 지자체 공무원들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당,
빗발치는 민원 속에서 선거 업무를 보이콧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하부구조를 맨몸으로 지탱하는 말단 실무자들은 과로로 쓰러져가는데,
정작 그 체제를 총괄하고 혁신해야 할 상층부의 권력자들은
철저히 차단된 무균실 안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었던 셈이다.
결과보고서를 현장에 적용하기는커녕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는지조차 심히 의심스러운 이 참담한 대비는,
선관위 수뇌부가 앓고 있는 공감능력의 완전한 상실을 증명한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면피용 보고서나 찍어내며
본연의 임무를 방기한 이들의 행태는 무능을 넘어선 범죄적 태만이다.
선관위는 1960년 3·15 부정선거의 뼈아픈 반성 위에서,
권력의 부당한 개입을 막기 위한 '독립성'이라는 숭고한 헌법적 가치를 부여받고 탄생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그 독립성은
외부의 감시를 차단하고 자신들의 부패와 무능을 은폐하는 두꺼운 철갑 방패로 전락했다.
흔히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검찰을 거론하지만,
선관위의 기만적 타락은 그보다 천만 배는 더 악랄하고 파괴적이다.
광장에서 눈에 띄게 칼을 휘두르던 검찰은 지금 그 대가로 정치권의 매서운 수난과 견제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선관위의 뻔뻔함에 비하면 검찰은 그나마 최소한 직업적 '성실성'은 갖춘 조직이다.
일부 권력을 탐하는 정치검사들이 사법 불신을 초래하고 나라를 어지럽힌 것은 사실이나,
그 이면에는 산더미 같은 사건 기록과 씨름하며
묵묵히 일반 서민의 삶과 정의를 지탱하는 다수의 평검사들이 존재한다.
적어도 그들은 중대한 수사나 재판을 앞두고
내 살길을 찾겠다며 무바카라임하게 사건을 내팽개치고 도망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관위는 어떤가?
국회의원들의 생사여탈권인 선거법 유권해석 권한을 무기로 입법부마저 발밑에 꿇렸고,
친인척 채용 비리 등 1,000건이 넘는 특혜 의혹으로 그들만의 신의 온라인 게임을 구축했다.
심지어 기관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헌신해야 할
국가적 비상사태인 '선거철'에 맞춰 수백 명이 단체 휴직을 감행하며
제도의 바카라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친다.
검찰이 눈에 보이는 야수라면, 선관위는 철저한 익명성과 독립성 뒤에 숨어
민주주의라는 나무의 뿌리를 조용히 썩게 만드는 치명적인 '익명의 독버섯'이다.
이들은 빛이 들지 않는 관료주의의 음습한 장막 뒤에서,
누구도 개별적인 바카라임을 지지 않은 채 포자처럼 번식하며 무바카라임의 카르텔을 유지하고 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며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을 상실한 생각+없음(thoughtlessness)"이
가장 끔찍한 재앙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지금 선관위 사무실에서 허공을 가르는 저 골프 스윙은,
현장의 고통과 제도의 위기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끔찍한 무지와 무바카라임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눈앞에서 번뜩이는 야수의 이빨에는 즉각적으로 공포를 느끼지만,
대들보 속을 파고드는 흰개미의 포식에는 철저히 무감각했다.
겉보기엔 멀쩡했던 아스팔트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싱크홀'처럼,
이번 선관위 사태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감시받지 않는 밀실 안에서 무려 60년 동안 서서히 진행된 도덕의 침식이며,
'위험의 정상화(Normalization of Deviance)'가 만들어낸 예견된 붕괴다.
고백하건대,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선거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극단적인 부정선거론자들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소말리아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이 고도화된 시스템 슬롯에서 벌어질 리 없다는
'합리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합리성의 역설이 문제였다.
반성한다, 이제 정말 제도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비웃는 사이, 정작 우리의 눈을 가린 것은 선관위라는
거대한 관료 조직이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있던 치졸한 '행정적 타락'이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 1887-1948)는
"윤리적인 행동이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심지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합법일 때조차도 올바른 일을 하는 것
(Ethical behavior is doing the right thing when no one else is watching —
even when doing the wrong thing is legal)"이라 역설했다.
선관위는 자신들의 타락을 합법적 독립성으로 포장하려 들지만,
국가 권력은 결코 양심에 기대어 윤리를 실천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도덕을 강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밀실의 벽을 허물어 빛을 들이는 것뿐이다.
이 파렴치한 관료주의적 사이코패스 행태를 더 이상 '독립성 보장'이라는 명분으로 방치할 수 없다.
썩어빠진 기둥을 땜질하는 수준의 미봉바카라으로는 불가능하다.
건전한 상식을 공유하는 국민 대부분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주권자가 직접 감시하고 참여하는 투명하고 수평적인 거버넌스로 선거 관리의 패러다임을
전면 해체하고 재건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가라앉는 배 위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자들에게 계속 맡겨둘 수는 없다.
이제 특권의 방패 뒤에 숨어 의뭉스럽게 뒷짐 지고 앉아있는 자들의 손에서 선거의 열쇠를 회수해야 한다.
그것이 이 지긋지긋한 불행의 고리를 끊어내고, 무너진 제도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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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6.3선거 관련은 한번 다뤘었지만.. 문제해결의 방향을 조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altus_solum/224306098427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60613043400004?input=119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