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 새만금 방조제를 달리면 33.9킬로미터의 길이 이어진다. 한쪽에는 바다가 펼쳐지고, 다른 쪽에는 바다를 메워 만든 땅과 도로, 산업단지가 나타난다.
이곳에 들어설 미래는 배터리로 상징된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배터리를 만드는 소재, 사용이 끝난 배터리를 재활용하는 산업까지. 새만금은 새로운 산업의 중심지가 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군산은 산업의 미래를 처음 약속받는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에는 오래된 산업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따라가면 쌀과 항구, 미두장과 공장,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쌀이 돈이 되던 도시
일제강점기 군산의 번영을 이해하려면 먼저 쌀을 보아야 한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군산항을 통해 외부로 반출됐다. 항구에는 창고와 정미소가 들어섰고, 쌀을 운반하는 선박이 오갔다. 군산은 농업 생산지와 항구, 해외 시장을 연결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성장을 오늘날의 산업 발전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당시 군산의 근대화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쌀 반출 구조 속에서 진행됐다. 항구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상업이 성장했다고 해서 그 이익이 생산자와 지역 주민에게 고르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쌀이 군산의 경제를 움직였다면, 쌀의 가격은 사람들의 욕망을 움직였다.
1932년 문을 연 군산미곡취인소는 흔히 미두장이라고 불렸다. 미두는 쌀과 콩 등 곡물의 시세 차이를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거래였다. 사람들은 곡물의 가격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고 돈을 걸었다. 실제로 곡식을 생산하거나 운반하는 일과, 가격 변동을 이용해 돈을 버는 일은 서로 다른 경제활동이었다.
군산미곡취인소에서는 오사카의 쌀 시세가 중요한 기준이 됐다. 군산의 쌀 거래는 지역의 농업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의 시장과 연결돼 있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는 미두장에 빠져 재산을 잃는 인물이 등장한다. 미두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장소가 아니었다. 일확천금의 기대가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 기대가 무너질 때 한 사람의 삶까지 흔들릴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군산의 풍경에는 두 가지 모습이 함께 있었다. 항구를 중심으로 상업과 금융이 움직이는 근대도시의 모습, 그리고 식민지 경제의 구조 속에서 삶의 기반을 잃거나 부를 축적할 기회를 제한받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도시의 번영과 주민의 번영은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군산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여기에서 나온다. 한 도시에서 큰돈이 움직이고 산업이 성장할 때, 그 성과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공장이 멈추면 도시도 흔들린다
시대가 바뀌면서 군산의 산업도 달라졌다.
쌀과 항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경제에 제조업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공장은 상품을 생산하는 시설이면서 동시에 일자리와 소비를 만들어내는 기반이었다. 노동자가 월급을 받고, 그 월급이 식당과 상점과 주거비로 흘러가면 공장 주변에 하나의 생활경제가 형성됐다.
산업은 공장 담장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협력업체와 운송업체, 식당과 상점, 노동자의 가족과 지역의 생활이 서로 연결된다. 한 기업의 생산이 지역경제의 여러 부분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 연결은 산업도시의 힘이지만, 동시에 취약점이 될 수도 있다.
2017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가동을 중단했다. 이듬해인 2018년에는 한국GM 군산공장이 폐쇄됐다. 군산은 조선업과 자동차산업의 위기가 겹치는 충격을 겪었다. 협력업체와 관련 노동자, 지역의 소상공인도 영향을 받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군산을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과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해 대응바카라을 마련할 정도였다.
공장이 멈춘다는 것은 생산라인이 멈추는 일만이 아니다.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은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협력업체는 거래처를 잃고, 매출이 줄어든 가게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사람도 생긴다. 한 산업의 위기가 지역의 여러 생활로 번져가는 것이다.
이때 사라지는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익힌 기술과 숙련,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세웠던 생활계획, 한 지역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흔들린다.
물론 군산의 모든 변화를 두 공장의 가동 중단과 폐쇄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인구와 산업의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다만 두 사건은 한 지역의 경제가 특정 산업과 얼마나 깊이 연결돼 있을 때, 그 산업의 위기가 얼마나 넓게 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산업의 성장에는 여러 주체가 참여하지만, 산업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 비용을 감당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기업은 사업을 축소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 노동자는 온라인 게임을 잃고, 소상공인은 손님을 잃으며, 지역은 일자리와 소비를 함께 잃을 수 있다.
기업의 위기와 도시의 위기는 같은 속도로 끝나지 않는다. 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지역슬롯가 이전의 일자리와 생활 기반을 회복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번에는 배터리다
새만금은 이제 이차전지 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차전지는 충전해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다.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에 쓰이며, 배터리 소재의 생산과 재활용까지 관련 산업의 범위가 넓다. 새만금 국가산업단지는 이차전지 특화단지로 선정됐고, 관련 기업의 입주와 투자계약이 이어졌다.
새만금개발청은 2024년 4월 기준으로 이차전지 관련 기업 18개사가 총 4조 9천억 원 규모의 입주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는 새만금이 배터리 산업의 생산기반을 유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다만 입주계약액은 실제 생산액이나 지역에 돌아간 소득과 같지 않다.
새로운 산업의 등장은 군산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공장이 가동되면 생산과 고용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관련 소재와 장비를 공급하는 기업이 성장할 수도 있다. 기존 제조업에서 일하던 숙련 노동자가 새로운 산업에서 자신의 기술을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투자계약이 실제 착공과 생산으로 이어져야 한다. 둘째,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지역 주민에게도 실질적인 기회가 되어야 한다. 셋째, 관련 기업과 협력업체가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산업의 성과가 지역의 소비와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공장 하나가 들어섰다는 사실만으로 이 조건들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시설은 지역에 있어도 핵심 기술과 의사결정이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 고용이 늘어나더라도 지역 주민이 원하는 수준의 안정적인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투자 규모가 커도 지역의 소상공인과 다른 기업에 돌아가는 효과는 기대보다 작을 수 있다.
반대로 지역의 교육기관과 기업, 숙련 노동자와 협력업체가 새로운 산업의 가치사슬에 연결된다면 산업의 성과는 더 넓게 퍼질 수 있다.
결국 새만금의 과제는 공장을 유치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공장을 지역경제의 일부로 만드는 일까지 이어져야 한다.
산업은 바뀌어도 질문은 남는다
군산의 역사를 쌀과 미두, 제조업, 배터리 산업으로 이어서 보면 서로 다른 시대의 모습이 드러난다.
일제강점기의 쌀 경제는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구조 속에 있었다. 현대의 제조업은 다른 정치·경제적 조건에서 운영된다. 두 시대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산업의 성과와 위험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묻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다.
쌀이 항구를 통해 대량으로 거래되던 시대에도 거래의 규모가 모든 사람의 번영을 뜻하지는 않았다. 제조업이 성장하던 시대에도 공장의 생산이 지역의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이제 배터리 산업이 성장한다면 그 성과 역시 실제 고용과 지역의 생활, 기업 간 연결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도시의 역사는 투자액과 생산량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 물건을 운반한 사람, 가게를 운영한 상인, 산업의 위기 앞에서 온라인 게임을 옮기거나 도시를 떠난 사람도 그 역사의 일부다. 새만금의 갯벌에서 낙지를 잡던 어민 역시 마찬가지다.
바다였던 곳에 땅이 생겼다. 그 땅 위에 새로운 산업이 들어선다. 풍경은 바뀌고, 기술은 바뀌며, 도시가 미래를 설명하는 말도 달라진다. 그러나 산업의 변화가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을 저절로 기록해 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산업이 과거의 상처를 모두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과거의 위기가 미래의 가능성까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산업 전환이 어떤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에 어떤 역량을 남기며, 그 성과를 누구와 나눌 것인가다.
배터리는 전기를 저장한다. 산업은 자본과 기술을 축적한다. 도시는 새로운 일자리를 통해 미래를 준비한다.
그렇다면 한 도시의 기억은 어떻게 남을까.
옛 미두장의 기록은 박물관에 남고, 공장의 가동 중단은 통계와 기사에 기록된다. 새만금의 투자계약도 공식 문서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숫자와 기록 사이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은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
새만금의 미래를 묻는다는 것은 새로운 공장이 얼마나 큰 성과를 낼지 묻는 일만은 아니다.
새로운 산업이 들어선 뒤,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