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익어가는 계절

증조 할아버님 산소에 가다

by한현주

사과가 익어가는 계절

Gemini_Generated_Image_nm3cvgnm3cvgnm3c.png


추석을 맞아 아버님 사과농장에 다녀왔다. 그동안 두세 번 시골에 갔지만 사과가 나무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과 밭을 가기 전, 남편과 아버님, 그리고 작은아버님 식구들과 함께 증조할아버님 산소에 갔다. 오랜만에 들어서는 울창한 시골길은 처음 왔을 때 보다 무섭지 않았다. 여전히 늘어져있는 버드나무는 이전 보단 환하게 맞이해 주는 것만 같았다. 유난히 덜컹거리던 시골 산길을 올라 증조할아버님을 만났다. 산길에 차를 대고 조수석에서 내리려고 보니 다리가 닿지를 않았다. "다리가 안 닿아요!" 한마디에 모두가 웃었다. 예쁘게 깎아놓은 몇 그루의 나무 뒤로 보이는 산소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작은 아버님댁 두 아들은 잠이 덜 깼는지 한 명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버님과 작은어머님, 작은 아버님이 산소 앞 작은 상을 차렸다. 모두가 절을 하는 가운데, 나는 묵념으로 기도 했다. 예를 지키고, 산소를 내려가기 전 다들 도토리를 발견했다며 다시 뒤돌아 산소 뒤편의 도토리를 줍기 시작했다. 신기한 마음에 바닥을 들여다보았으나 코빼기도 안 보이는 도토리에 연신 두리번거렸다. 옆에서 잘 주우시는 작은 아버님께, "보여요?"라고 물었다. "여기 있잖아, 여기" 하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건네시더니 도토리를 연달아 주웠다. 나는 다시 봐도 보이지 않았다. "왜 난 안 보이지!" 하니 큭큭하며 웃으셨다. 모두가 주워낸 도토리는 손가락 두마디도 안되게 작아 귀여웠다.


KakaoTalk_20261006_111212027_01.jpg


차를 타고 조금 더 이동해 사과밭으로 갔다. 사과밭 중앙 뒤쪽을 보니 시 할아버님 산소가 보였다. 초가을에 보는 사과받은 빨갛게 익어 참 예뻤다. 가까이에서 사과나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와 예뻐요!" 휴대폰 들고 찰칵찰칵 돌아다녔다. 저 멀리 멋스러운 학가산과 주변에 울려 퍼지는 불경은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줬다. 기독교인 나는 주변 절간에서 들리는 불경이 낯설었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건 사실이다. 나는 자연을 좋아한다. 사람 손이 타 정돈된 주변 밭과 사과밭에는 보답하듯 먹음직스러운 과실이 열려있었다. 구경을 다 하고 시 할아버님 산소 앞에 모였다. 새를 쫓아내려 울리는 소리에 흠칫 놀랐지만 그것도 금세 익숙해졌다. 작은 상을 차리고, 음식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마지막에 술 한잔을 직접 올렸다. 기도도 했다. 기도 한 번은 하나님께, 또 한 번은 시 할아버님께. 모시는 신에게 감사를, 할아버님께는 예를 갖췄다.


KakaoTalk_20261006_111212027_10.jpg


인사가 끝나고 남은 술이 어디 있나 나 보니 작은 아버님댁 둘째 아드님이 한 손에 들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인 친구가 술병 들고 돌아다니는 걸 보고 가족들은 웃었다. 재미있던 점은 집에 갈 때까지 그 병을 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얘 어딨는지 함 봐봐, 술병 들고 돌아다는 게 수상해" 라며 작은어머님이 말했다. 염려와 다르게 저 멀리 묶여있는 아버님이 키우는 개 앞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마시려는 게 아닌, 그냥 재미있어서 들고 다니는 것 같았다. 다들 각자 출발하기 전 정리를 하고, 산바카라을 즐겼다. 작은 어머님이 몇 알 건네준 연두색 대추알을 보니 참 반들반들 예쁘게 생겼다. 어머님은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했다. 한입 깨물어 먹어보니 사과와 비슷한 맛이 언듯 났다. 삼계탕에 들어가는 대추는 너무 달아 안 먹었는데, 바로 딴 대추는 달고 맛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작은아버님이 보였다. "대추예요 드세요 맛있어요" 하니 작은 아버님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대추 보면 먹어야 예뻐진데" "헐 진짜요? 먹어야겠다" 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남편이 보여 대추를 건넸다. "나는 안 먹을래" "대추 보면 먹어야 예뻐진데!" "진짜?" 놀라면서도 안 먹는 남편이 괜스레 귀여웠다. 며칠 뒤 아버님이 가져다주신 머루와 사과 위에 대추 몇 알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걸 주워 먹으니 남편이 "맛있어? 이건 씨가 없나?"하고 궁금해했다. "씨는 있어. 먹어볼래? 사과랑 비슷해"하니 "절대 안 먹어"라고 한다. 궁금해하는 남편에게 대추를 먹일 생각 하니 신나서 대답했는데 실패했다. 아쉬운 마음에 "탕에 들어가는 대추랑 달라, 맛있는데~" 하며 지나가는 말로 꼬셔보기도 했지만 관심을 끌진 못했다.


KakaoTalk_20261006_111212027.jpg


이날 아침을 먹지 않아 슬슬 배가 고팠다. 술 병들고 다녔던 작은 아버님댁 둘째 아드님을 데리고 남편과 셋이 중식집을 갔다. 나는 중식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남편이 극찬하던 이 중식집은 달랐다. 엄청 매운 고기짬뽕이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한번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땐 다른 짬뽕을 먹어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남편이 먹고 있는걸 한입 먹어봤는데 확실히 달랐다. 그렇게 매운 걸 좋아하는 우리 셋은 매운 짬뽕에 맵기 조절을 해서 주문했다. 자신 있게 한입 먹은 둘째 아드님은 뭔가 잘못됐다는 듯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한입 먹어봤는데 처음에는 맵지 않던 맛이 슬슬 입안을 달궜다. 그래도 먹을만했다. 캅사이신이 아닌 청양고추로 맛을 낸 것 같아 뒤끝맛이 깔끔했기 때문이다. 남편도 평소보다 맵기 조절을 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여보 다음부턴 꼭 이렇게 조절해서 먹어"라고 했더니 그래야겠다며 그동안 조절 안 한걸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문제는 둘째 아드님이었다. 나는 "힘들면 볶음밥 따로 시켜줄게 무리하지 마"라고 했는데 정작 본인은 정말 괜찮다며 끝까지 다 먹었다. 탕수육 안 시켰으면 세명 다 매워서 펄쩍 뛰었을 것이다. 중간에 둘째 아드님이 동그란 눈을 뜨며 나를 봤는데, 알고 보니 너무 매워 콜라를 마시고 싶다는 신호였다. 진작 시켜줄걸. 결국 콜라를 먹어도 되겠냐며 말을 꺼냈다. "아이고 괜찮으니 주문해!" 그 말과 동시에 매운 짬뽕국물이 눈에 들어갔다. "헉" 그 매운 게 눈에 들어가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물컵을 들고 뛰쳐나가 가게 앞에서 눈을 헹궜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창피함도 몰랐다. 눈이 너무 매웠기 때문이다. "아이고!" 남편이 뒤따라 나왔다. 다행히 금방 가라앉았다. 옆 테이블에 새로 온 손님은 내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매우면 저럴까"했다. 눈에 들어가서 그런 건데... 딱히 해명은 안 했다. 점심을 다 먹고 세명 다 입이 퉁퉁 부운채 커피를 사러 갔다. 그동안 게임을 너무 못해서 하고 싶다던 둘째 아드님을 데리고 집으로 와 남편과 게임을 하게 뒀다. 나는 피곤함에 침대에 누워있었다. 갑자기 작은어머니가 둘째 아드님에게 전화를 했다. 외할머니 보러 가자고. 게임은 두 판도 못해본 아드님은 아쉬운 얼굴을 띄운 채 저녁에 보자고 집을 나섰다.


KakaoTalk_20261006_111212027_15.jpg


저녁시간이 되고 할머님, 아버님, 작은집 둘째 아드님, 남편 이렇게 모였다. 친정에서 추석 선물로 소고기를 보냈는데 함께 먹자며 아버님이 초대해 주셨다. 작은 아버님이 가져다주신 와인과 함께 먹었다. 와인은 매우 달아 맛있었다. 소고기는 아버님이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다. 다들 배부르다며 젓가락을 놨을 때 아버님과 나는 끝까지 남아 소고기를 다 먹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 도란도란 앉아 낮에 찍은 사과 맡 사진을 함께 보았다. 시간이 지나 예매해 둔 영화시간이 다가왔다. 남편과 둘째 아드님이 고른 영화를 보러 영주 롯데시네마로 향했다. 누군가 우리가 예매해 둔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시 확인해도 그 자리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죄송하지만 표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다음날 예매권을 오늘인 줄 알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나름 만족했다. 둘째 아드님과 함께 다니면서 느낀 것은 우리에게 중학생 아들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정말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빨리 낳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날 둘째 아드님을 보며 아들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 마음대로 성별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남편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며 아이는 2,3년은 보자고 한다. 나도 나이가 있어 불안하지만 급하게 준비하면 탈이 날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KakaoTalk_20261006_111212027_02.jpg


영주에 온 지 벌써 7개월이 지났다. 봄을 지나 여름을 느끼고 이제 가을이 왔다. 한 계절, 한 계절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추석도 지났다. 처음 영주에 왔을 때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던 서울, 부천과는 다르게 8시만 넘으면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고, 새벽도 아닌 늦은 밤만 되어도 도로에 차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시내를 벗어나 산바카라을 하다 보면 몇 발자국 안되어 있던 카페가 영주에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아주 가끔 먹고 싶은 떡볶이를 주문하려면 타이밍도 잘 맞아야 했다. 부천에는 여덟 곳이나 있는 엽기떡볶이집은 영주에 한군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맥도널드도 영주에는 없다. 이런 점들이 아쉬웠지만 지내다 보니 좋은 점도 많다. 부천에서 느끼지 못했던 아카시아 향기, 사람 소리가 작아 글 집중이 잘되는 이른 오후의 고요함, 정겨운 옛날 문방구,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빼놓지 않고 서로 인사하는 모습들까지. 이런 장점들을 보니, 사람도 사과나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무가 하루아침에 자라는 게 아니듯, 나 또한 영주에서 하루아침에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꾸준히 가꾸고 사랑을 주는 남편과, 따뜻한 말로 걱정해 주시는 할머님, 밥은 먹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챙겨주고 제철 과일과 맛있는 먹거리가 있으면 1순위로 챙겨주시는 아버님이 있기에 잘 자란 사과나무처럼 영주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라는 과실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KakaoTalk_20261006_111212027_13.jpg


이사 오기 전 우리 가족은 참 말도 많고 탈이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이는 가족이 없어, 아빠와 나만 모이거나 종종 친할머니도 뵈러 갔는데 그때마다 아빠랑 나는 투닥거리기 일쑤였다. 즐거운 날도 있었지만 말다툼이 시작되면 언성이 높아지는 아빠 때문에 가슴이 자꾸 철렁했다. 하지만 영주에서의 시댁은 달랐다. 큰집 작은집, 고모들까지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다툴 일 없이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고 웃을 일이 있으면 활짝, 까르르 웃는 작은 어머님과 큰 고모님, 나를 보면 언제나 활짝 웃어주시는 아버님. 무슨 일 있으면 걱정을 하는 고모님들. 나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시댁에서 배웠다. 그래서 시댁에 갈 때면 마음이 편하다. 제사 문제 또한 지금처럼 예를 갖춰 기도드리면 된다. 추석이 한참 지나, 아버님께 연락이 왔다. 추석에 있었던 일에 아버님께서 마음이 쓰이신 것 같았다. 아버님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한다며, 나를 달래주셨다. 앞으로 행복하자고. 나는 아버님의 섬세함에 감동했다. 아무래도 내가 과거에 상처가 있었던 일들에 대한 보답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가족을 만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KakaoTalk_20261006_111212027_14.jpg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는 계절, 나 또한 영주에 뿌리를 내리고 예쁜 열매를 맺고 있다. 그동안 나의 중심이 아빠였다면, 이제는 나를 진정으로 찾아가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 과정에는 남편의 사랑과, 시아버님의 섬세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닐까? 영주에 처음 왔을 때 이곳은 그저 남편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이제는 나에게도 영주에 추억이 생겼다. 이제 영주는 내가 살아가는 곳이 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혹시라도 본인처럼 새로운 도시에서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만의 계절을 느끼고, 일상을 기록해 보았으면 좋겠다. 사람과 무리마다 성향이 다르듯, 지역마다 조금씩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당신 따라 영주에 왔습니다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전 10화기독교 며느리의 첫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