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마일로

Part I

by제윤

계약서에 서명할 것인지 오늘 안으로 알려달라는 메시지가 온 것은 청담동 아파트에서 마지막 상자가 빠져나간 직후였다. 현관문이 닫히자 조금 전까지 집 안을 오가던 사람들의 발소리와 테이프 뜯는 소리가 한 번에 사라졌다.

거실은 실제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소파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먼지의 가느다란 테두리가 남아 있었고, 벽에는 정상화 작가의 액자를 떼어낸 부분만 주변보다 밝았다.

그는 그림이 걸려 있을 때에는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벽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보았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새 소속사의 대표였다. 오늘 답을 주면 제작진의 일정을 그대로 잡아두겠다는 내용이었다.

회사 이름이 인쇄된 봉투와 검은색 펜, 마일로의 검역 서류가 든 투명 파일이 식탁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가구가 거의 빠져나간 뒤에도 식탁만은 남아 있었다.

계약서와 함께 받은 펜은 몇 번이나 뚜껑을 열었다 닫았지만 아직 종이에 닿은 적이 없었다.

조건은 좋았다. 사인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 보였다.


데뷔하기 전에는 앞에 있는 것만 보면 됐다.

데뷔했고, 팀이 잘됐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그 이름으로 살았다. 그런데 그다음은 이상하게 또렷하지가 않았다. 계속할 수 있다는 것과 계속하고 싶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마지막 장 서명란 위에는

십 년 넘게 사용해 온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BEN.


공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같은 순간에 발을 구르며 부르던 이름이었다.

펜을 들자 식탁 아래에 엎드려 있던 마일로가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드나든 탓에 물건 하나가 나갈 때마다 짖느라 제대로 잠들지 못한 마일로는

그의 무릎에 코를 대고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발밑에 자리를 잡았다.

펜 끝이 종이에 닿으려던 때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달 입대를 앞둔 도윤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오다가 거의 비어버린 거실을 보고 문 앞에 잠깐 서 있었다.


“진짜 가는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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