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너나 잘 하세요! 제발!
나는 가끔 문장을 읽다가 화가 난다.
틀린 문장이라서만은 아니다. 논리가 조금 어긋났다고 언제나 화가 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엉성한 글도 많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도 널렸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살았다가는 내 하루가 남의 문장 뒤치다꺼리로 끝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의 어떤 문장은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내 심기를 정확히 건드리는 순간이 있다.
앞에서는 제법 매끄러웠다. 생각도 잘 정리된 것처럼 보였고 문장도 반듯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순간, 갑자기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달아오른다.
‘아니, 잠깐만. 앞에서 그렇게 써놓고 결론이 왜 이렇게 되지?’
처음에는 단순한 의문이다. 하지만 곧 의문은 검증이 되고, 검증은 추궁이 된다. 어느 순간 나는 상대의 오류를 찾아내고, 꼬집고, 바로잡아주고 싶어 한다. 아니, ‘싶다’보다 ‘그래야만 한다’에 가까워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의 생각은 애초부터 내 통제 범위에 있지도 않은데.
참 피곤한 성격이다.
너나 잘하지…..너나 잘 하세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머릿속에서는 반박문 몇 편이 완성되어 있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내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틀림’ 자체가 아닌 것 같다. 어설픈 눈속임에 더 가깝다.
AI의 도움을 받든, 다른 도구를 쓰든 나는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기 생각이 중심에 있고 그것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무엇을 덧칠하든 그건 각자의 방식이다. 애초에 인간은 늘 무언가를 빌려 쓴다. 바카라에서 문장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사고방식을 배우고, 이제는 AI에게 표현을 빌리기도 한다.
그런데 빌려온 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않은 흔적이 보이는 순간, 나는 묘하게 불쾌해진다.
매끄러운 문장 사이에 갑자기 사고의 밀도가 떨어지는 대목이 나타난다. 앞부분의 정교함과 마지막 자기 해석의 깊이가 맞지 않는다. 잘 차려입은 글의 끝자락에서 급하게 꿰맨 실밥이 보이는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생각한다.
속이려면 차라리 완벽하게 속이지.
적어도 자기 생각을 먼저 충분히 정리한 다음 AI에게 문장을 다듬어달라고 했어야지. 요약된 내용을 가져다가 얕은 감상을 덧붙이고 그것을 온전히 자기 글처럼 내놓으면, 읽는 사람은 뭐가 되나.
누굴 바보로 아나.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나는 그 허술함을 발견하는 데서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알아봤다’에서 끝내면 될 일을 ‘그러므로 너는 지적받아야 한다’로 밀어붙인다. 상대의 미숙함을 발견한 것이 어느새 내가 개입할 자격을 얻었다는 착각으로 바뀐다.
사실 타인의 허술함은 타인의 몫이다.
내가 그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교정자가 되어야 할 의무는 없다. 더구나 모든 관계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과 방식에 맞춰 형성하려 드는 것은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내 질서 안에 배치하는 일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 사실을 머리로 안다고 해서 마음이 순순히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더 골치 아픈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의 허술함은 웃고 지나간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끝난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균열 하나가 이상하리만큼 크게 보인다. 같은 오류인데도 온도가 다르다.
왜 하필 그 사람에게만 그러는가.
생각해보면 답은 오류보다 관계 쪽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 기대도 없는 사람에게는 실망할 일도 별로 없다. 마음을 주지 않은 사람의 허점은 그저 관찰 대상일 뿐이다. 반대로 이제 막 애정이 생기거나, 호기심과 기대가 생기거나, 좋아하는 것과 못마땅한 것이 기묘하게 뒤섞이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부터 상대의 작은 모순이 내게 너무 잘 보인다.
그리고 이상하게 거슬린다.
어쩌면 나는 그 사람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나 자신에게도 꽤 가혹하다.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생각에 구멍이 없는지 확인하고, 내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검열한다.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완벽한 쪽으로 가려고 나를 몰아붙인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자신에게 들이대던 자를 슬그머니 상대에게도 갖다 댄다.
나는 이만큼 의심했는데.
나는 이만큼 생각했는데.
나는 내 문장 하나에도 이렇게 바카라임을 지려고 하는데.
너는 왜 그러지 않았지?
그러니까 내가 상대에게 겨누는 날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나 자신을 향하고 있던 칼날이 방향을 조금 바꾼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칼은 아무에게나 가지 않는다.
내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꺼낼 이유도 없다. 역설적으로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이미 내 마음 안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애정과 애증의 경계쯤.
아직 관계라고 부르기에는 이르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신경이 너무 많이 쓰이는 자리.
그 애매한 곳에서 나는 상대를 유심히 읽는다. 너무 유심히 읽은 나머지 허점까지 발견하고, 발견한 허점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상대를 고쳐놓으려 든다.
그러나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 사람을 내 기준에 맞게 완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내가 발견한 모순이 실제 모순일 수도 있다. 상대가 정말 AI가 만들어준 매끄러움 뒤에 자기 생각의 빈약함을 감추었을 수도 있다. 내 독해가 정확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그다음 행동까지 자동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맞는 것과 내가 개입해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마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허술함을 못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볼 것이다. 문장의 균열도 보고, 논리의 비약도 보고, 사람이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다 미처 감추지 못한 틈도 볼 것이다.
그 눈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찔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저건 이상하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멈출 수도 있다.
‘나는 저 방식이 싫다.’
그것으로 끝낼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면, 상대를 내 기준에 맞게 뜯어고치는 대신 그 허술함까지 본 상태에서 내가 이 사람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싶은지를 결정하면 된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다.
남의 오류를 찾아내는 것보다 내 개입 욕구를 멈추는 것.
상대의 모순을 교정하는 것보다 내가 왜 그 모순에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 눈에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잘못조차 반드시 내가 바로잡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내가 정말 다듬어야 할 문장은 상대가 쓴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안에서 자동으로 완성되어버리는 문장인지도 모르겠다.
‘틀렸으니 바로잡아야 한다.’
그 문장 뒤에 이제 한 줄 정도는 덧붙여볼 만하다.
‘그래. 틀렸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게 꼭 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