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0월 15일 흰지팡이의 날이다.
1980년 세계 시각장애인 단체가 정한 날이다.
흰 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이 혼자 걷는다는 표시이자
그 길을 함께 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다.
해마다 이날이면 어딘가에서 기념식이 열린다.
올해 나는 가지 않았다.
보보와 하루를 통째로 같이 보냈다.
그래도 흰지팡이의 날은 흰지팡이의 날이라서
하루 종일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 길은 혼자 걸을 수 있는 길인가.
지팡이는 그 질문을 바닥에 두드려 묻고
탱고는 그 질문을 몸으로 끌어 묻는다.
요즘 나는 같은 질문을 휴대폰 화면에도 한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네 번 멈춰 섰다.
저녁에 보보와 이야기하다가 그 네 번이 하나의 단어로 묶인다는 걸 알았다.
데이터 빈곤.
첫 번째 멈춤
오전
접속
아침에 보보가 커피를 내리면서 물었다.
자기 이번 달 데이터 얼마나 남았어.
나는 휴대폰을 열어 확인했다.
보이스오버가 남은 양을 읽어 줬다.
생각보다 많이 썼다.
곰곰이 따져 보니 이유가 있었다.
사진을 찍어 설명을 듣는 앱.
문서를 올려 요약을 받는 AI.
길을 물어 안내를 받는 지도.
버스 도착 정보를 읽어 주는 앱.
이 앱들은 모두 서버와 이야기한다.
사진을 보내고 설명을 받아 오고
문서를 보내고 요약을 받아 온다.
그러니까 나에게 데이터는 눈 대신 쓰는 것에 가깝다.
나는 요금제를 고를 때 데이터 양을 가장 먼저 본다.
다행히 지금은 넉넉한 요금제를 쓴다.
보보가 커피잔을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그럼 데이터 적은 요금제 쓰는 시각장애인은
밖에서 앱을 못 쓰는 거네.
맞는 말이었다.
앱이 있고 쓸 줄도 아는데
그 앱이 가장 필요한 집 밖에서 데이터가 모자라 꺼 두는 사람이 있다.
국제적으로는 데이터 빈곤을
온라인에 접속하지 못하거나 필요를 채울 만큼 오래 접속해 있지 못하는 상태로 본다.
뒤쪽이 중요하다.
접속은 된다.
필요한 만큼 오래 머물 수가 없다.
통신비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보조기기 값과 유지 비용과 수리 비용이 함께 든다.
2023년 장애인실태조사에서 장애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305.8만 원으로
전국 가구 평균 483.4만 원의 63.3% 수준이었다.
같은 휴대폰을 들고 있어도
그 휴대폰을 켜 둘 수 있는 시간은 같지 않다.
비장애인에게 데이터는 대체로 편의다.
영상을 더 보거나 사진을 더 올리는 일.
나에게는 정류장 안내판을 읽고 약 봉투 글씨를 읽는 일이다.
줄이면 편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읽을 수 있는 세상이 줄어든다.
두 번째 멈춤
점심
접근성
점심은 보보와 동네 식당에서 먹었다.
식당까지는 걸어서 15분쯤이다.
오늘은 보보가 한 발 뒤에서 따라오고 내가 앞장섰다.
탱고의 하네스 손잡이로 길이 꺾이는 게 전해졌고
이어폰으로는 지도 앱이 남은 거리를 알려 줬다.
10월 한낮의 바람이 생각보다 서늘했다.
은행나무 열매 냄새가 나는 골목에서 탱고가 잠깐 속도를 늦췄다.
그 15분 동안에도 데이터는 계속 흘렀다.
자리에 앉자 보보가 말했다.
여기 테이블에 큐알코드 붙어 있네.
이걸로 주문하래.
직원을 부를 벨은 없었다.
주방 쪽에서 물 끓는 소리와 접시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보보가 휴대폰으로 큐알코드를 찍었다.
메뉴가 열렸고 보보가 하나씩 읽어 줬다.
나는 듣고 골랐다.
나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먼저 테이블 어디에 큐알코드가 있는지 손으로 더듬어 찾아야 한다.
찾아도 그 작은 사각형을 카메라 화면 한가운데 맞추는 일이 남는다.
겨우 열린 주문 페이지가 보이스오버로 읽힐지는 열어 봐야 안다.
많은 경우 메뉴 사진만 있고 버튼에는 이름이 없다.
석사 논문을 쓸 때 나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의 키오스크 사용 경험을 연구했다.
그때는 키오스크가 가게 입구에 서 있는 기계였다.
요즘은 그 기계가 테이블 위 스티커 한 장으로 작아졌다.
작아진 만큼 찾기는 더 어려워졌다.
2024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이행 실태조사에서
장애인이 이용하기 가장 어려운 무인정보단말기는 무인주문기였고
80.1%가 어렵다고 답했다.
시각장애인의 72.3%와 휠체어 이용자의 61.5%가 직원에게 주문하는 방식을 더 원했다.
이건 장애인이 기술을 거부해서가 아니다.
그 기술이 처음부터 장애인을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원 한 명이나 호출벨 하나나 다른 길 하나가 없으면
무인은 곧 권리가 없는 상태가 된다.
서비스가 있어도 보이스오버와 맞지 않거나
버튼 구조가 불친절하거나
음성과 자막과 쉬운 글이 없으면
그건 사실상 없는 서비스다.
2025년 조사에서 웹 접근성 전체 평균 점수는 70.4점이었다.
전년보다 나아졌다.
그래도 100점 중 30점만큼의 문은 아직 닫혀 있다.
그날 점심 주문은 보보 휴대폰에서 나갔다.
밥값은 내가 냈는데 주문 기록은 보보에게 남았다.
사소해 보이지만 기록은 늘 누군가의 것이다.
포인트도 쿠폰도 다음에 다시 주문하기 버튼도
그 기록을 가진 사람 쪽에 쌓인다.
나는 그날 그 식당의 손님이었지만
식당의 데이터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 멈춤
오후
기기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각자 일을 했다.
나는 원래 이 글을 휴대폰으로 시작하려고 했다.
소파에 기대 앉아 첫 문단을 받아 적다가 그만두었다.
휴대폰에서 긴 글을 쓰면 보이스오버로 앞 문장을 다시 듣기 위해
손가락으로 한 줄씩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디를 고치려 했는지 잊어버린다.
결국 노트북을 열었다.
키보드 단축키 몇 개면 문단 사이를 오가고 앞 문장을 바로 다시 들을 수 있다.
나는 노트북이 있어서 그만둘 수 있었다.
옆에서는 보보도 자기 노트북으로 논문을 읽고 있었다.
우리 집 거실에는 키보드 소리가 두 겹으로 났다.
그 소리가 오늘따라 조금 사치스럽게 들렸다.
컴퓨터보다 터치스크린 스마트폰에 기댈수록
할 수 있는 일과 익힐 수 있는 역량이 좁아진다는 연구들이 있다.
노트북 없이 휴대폰 하나로 입사 지원서를 쓰고
휴대폰 하나로 장학금 서류를 내고
휴대폰 하나로 행정 민원을 처리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파일 첨부 버튼이 휴대폰에서 안 눌리는 지원서 사이트도 떠올렸다.
국민 인터넷 이용률은 이미 95.0%다.
그 숫자는
휴대폰 화면으로 한 줄씩 거슬러 올라가며 1500자를 쓰는 사람과
노트북으로 단축키를 누르며 쓰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한다.
둘 다 인터넷을 쓰는 사람으로 세어진다.
통계는 접속을 세고 그 접속의 깊이는 세지 않는다.
네 번째 멈춤
저녁
역량과 지원
저녁 먹기 전에 다음 달 병원 진료를 앱으로 예약하려고 했다.
로그인까지는 됐다.
본인인증도 됐다.
마지막 단계에서 보안문자가 나왔다.
그림 속 숫자를 보고 입력하라는 것이었다.
음성으로 듣기 버튼은 없었다.
나는 보보를 불렀다.
보보가 내 휴대폰을 받아 숫자 여섯 개를 읽어 줬고 나는 그걸 입력했다.
이런 일은 자주 있다.
은행 사이트에서도 공공기관 사이트에서도 그림 속 글자는 마지막 관문처럼 나온다.
소리로 듣기 버튼이 있는 곳도 있지만
그 소리는 잡음이 섞여 있어서 몇 번을 다시 들어야 할 때가 많다.
대부분은 이렇게 30초 만에 끝난다.
보보가 옆에 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 30초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혼자서 로그인과 인증과 결제와 오류 해결을 할 수 없다면
온라인 서비스는 열려 있어도 닫혀 있는 것과 같다.
그때 사람은 디지털 시민이 아니라 대리 이용자가 된다.
2025년 디지털 정보격차 조사에서 취약계층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의 77.9%였다.
그 안을 나눠 보면 접근 수준은 96.6%인데
활용 수준은 80.5%이고 역량 수준은 65.9%다.
장애인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84.1%였다.
숫자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기기를 갖고 있다는 것에서
그 기기로 뭔가를 해낸다는 것으로 갈수록.
같은 2023년 실태조사에서 등록장애인 중 65세 이상은 54.3%였고
35.3%가 일상생활에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국가에 가장 먼저 바라는 것도 소득보장 43.9%와 의료보장 26.9%와 고용보장 7.9% 순이었다.
나이 들고 소득이 낮고 건강이 약하고 일상에 손이 필요한 사람에게
디지털 전환의 비용을 각자 알아서 감당하라고 하는 건
처음부터 같은 출발선이 아니다.
보보의 질문
저녁을 먹으며 보보에게 오늘 하루 멈춘 이야기를 했다.
보안문자 이야기에서 보보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물었다.
내가 대신 읽어 주면 그 예약은 자기가 한 거야 내가 한 거야.
나는 내가 한 거라고 했다.
보보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목소리가 그렇게 들렸다.
그럼 내가 없는 날은.
거기서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 계정과 내 예약과 내 결제 기록.
이름은 내 것인데 마지막 문 하나의 열쇠는 가끔 보보에게 있다.
보보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답게 질문을 하나 더 얹었다.
자율이라는 게 혼자 다 하는 거라면 우리 중에 자율적인 사람이 있긴 해.
문제는 도움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그 도움이 없으면 같이 멈추는 구조 아닐까.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나는 보보의 도움이 부끄럽지 않다.
다만 보안문자 하나 때문에 보보가 있어야만 끝나는 예약이라면
그건 보보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예약 화면의 문제다.
네 겹
그 말을 들으며 오늘을 다시 정리했다.
밖에서 데이터를 아껴야 하는 사람.
테이블 위 큐알코드 한 장.
휴대폰 하나로 긴 글을 써야 하는 사람.
그림 속 숫자 여섯 개.
이 네 장면은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인다.
요금 문제이고 설계 문제이고 기기 문제이고 지원 문제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겹치면 다른 모양이 된다.
접속이 짧으면 기기를 익힐 시간이 줄고
기기가 작으면 접근성의 결함이 더 크게 느껴지고
접근성이 나쁘면 혼자 해결하는 역량이 자랄 틈이 없고
역량이 없으면 결국 누군가에게 기대게 된다.
나는 오늘 네 번 멈췄지만 네 번 다 금방 다시 걸었다.
넉넉한 데이터와 노트북과 옆에 있는 보보 덕분이다.
그 셋 중 하나만 빠져도 오늘 하루는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데이터가 적었다면 아침 산바카라길의 지도 앱을 껐을 것이다.
노트북이 없었다면 이 글은 아직 첫 문단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보보가 출장이라도 갔다면 점심 주문은 주방 앞에서 기다리는 일로 바뀌었을 것이고
병원 예약은 다음 날로 미뤄졌을 것이다.
같은 하루가 조건 하나에 따라 네 번 다르게 접힌다.
데이터 빈곤은 통신비가 모자란 상태가 아니라
디지털 슬롯의 입구에서 같은 사람이 여러 번 멈춰 서는 자리다.
데이터 빈곤층이라는 말은 아직 법에 있는 말이 아니다.
디지털 배제를 설명하려고 쓰는 분석의 말에 가깝다.
그래도 나는 이 말이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개인의 기술 미숙에서 꺼내
슬롯가 누구를 기준으로 설계했는가의 문제로 옮겨 주기 때문이다.
현행 디지털포용법은 디지털포용을
슬롯의 모든 구성원이 차별이나 배제 없이 지능정보기술의 혜택을 고르게 누리도록 환경을 만드는 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서비스를 쓰지 않더라도 실질적으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대체수단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바카라무로 둔다.
대체수단을 법에 적어야 했다는 건
지금까지의 설계가 대체수단 없는 표준 이용자 한 사람만 상정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AI라는 가속기
오늘 하루 나도 AI를 많이 썼다.
식당 영수증을 찍어 금액을 확인했고
병원 앱 메뉴 구조를 물어봤다.
나에게 AI는 시간을 벌어 주는 도구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해야 했던 일을 혼자 한다.
다만 완벽하지는 않다.
오늘 영수증을 찍었을 때 AI는 합계를 1만 원쯤 다르게 읽었다.
이상해서 보보에게 다시 확인해 달라고 했다.
결국 마지막 확인은 또 사람이었다.
국민의 67.0%가 일상에서 AI 서비스를 경험했고
44.5%가 생성형 AI를 써 봤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AI가 장애인의 노동 참여를 돕고
예전엔 비싼 장비에만 있던 기능을 값싼 앱과 범용 기기로 옮겨 올 수 있다고 본다.
동시에 좋은 학습 데이터가 부족하고 기술이 아직 덜 익었으며
무엇보다 슬롯의 편견은 AI만으로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AI도 결국 데이터 위에서 돈다.
무료 버전은 몇 번 쓰면 막히고
유료 구독은 매달 나간다.
AI는 격차를 줄이는 기술이 아니라 격차를 빠르게 만드는 기술이다.
이미 앞에 선 사람은 더 앞으로 가고
입구에 선 사람은 같은 자리에 더 오래 선다.
제목: 겹의 아키텍처 혹은 네 번 멈춰 서는 입구.
그래서 대응도 겹으로 해야 한다.
접속비와 보조기기와 유지 보수와 접근 가능한 소프트웨어를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지원하는 일.
공공과 민간의 모든 AI 서비스에 대체수단을 의무로 두는 일.
일회성 앱 사용법이 아니라 인증과 신청과 금융과 의료와 고용과 AI 활용까지 이어지는 생활 기술 교육.
그리고 장애인 당사자가 기획과 개발과 평가에 직접 들어가는 일.
유엔도 장애인의 디지털 접근에서 비용과 접근성과 교육을 함께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셋 중 하나만 고치면 나머지 둘에서 다시 멈춘다.
결론: 장애인을 데이터 빈곤층으로 남겨 둔 채 기술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말하는 슬롯는
진보한 슬롯가 아니라 배제를 더 정교하게 자동화한 슬롯다.
필요한 건 더 화려한 AI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접속하고 이해하고 활용하고
필요할 때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공적 설계다.
흰 지팡이가 이 길을 혼자 걸을 수 있냐고 묻는 도구라면
디지털 슬롯에도 그 질문을 던질 지팡이가 하나 필요하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 보보가 내 가방에서 접힌 지팡이를 꺼내 펼쳐 봤다.
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딸깍딸깍 소리가 났다.
보보가 오늘이 이 친구 생일이라며 지팡이 끝으로 내 발등을 톡 쳤다.
그 소리에 탱고가 벌떡 일어나 지팡이 냄새를 한참 맡았다.
녀석은 이 기다란 물건이 자기 동료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오늘 하루 나를 끌고 다닌 건 탱고였는데 축하는 지팡이가 받았다.
탱고 생일은 4월이니까 그때 갚아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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