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들꽃들의 수다〉

꽃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 줄 때

by쉼표JEONGSEON


당신은 아침에 피어나는 화려한 꽃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해 질 녘 가만히 꽃잎을 오므리는 작은 들꽃을 좋아하시나요?

세상은 늘 눈부시게 밝은 아침 해만 보라며 우리를 등 떠밀지만, 정작 하루치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견뎌낸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건 해 질 녘 수줍게 어깨를 맞대는 작은 위로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의 높은 곳만 바라보느라 정작 밟히고 지친 당신의 마음을 돌아보지 못하셨다면… 이 시를 나지막이 콧노래처럼 얼러보아 주세요.

해 질 녘 들꽃들의 수다

해가 산마루에 걸터앉으면

들꽃들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빨간 꽃은 우아하게

노을빛 담고

노란 꽃은 방그레

시름을 잊고

하얀 꽃은 도도히

자리를 지키고

보라꽃은 수줍게

치맛자락을 여민다

하루 일 마친 아낙네들처럼

살랑이는 바람결에

온종일 쌓인 서러움

토해 내며 웃는다

이름 없는 들꽃이라

세상이 스쳐 지나도

저마다의 빛깔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 준다

"오늘도 애썼다."

"참 고생 많았다."

해가 서산 너머로

마지막 불꽃을 내리면

들꽃들은 그 따스한 볕을

이불 삼아 덮고

내일도 여기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 하나 남겨 둔 채

가만히 입을 다문다

시를 쓰고 나서 : '보라'에게 건네는 안부

아침 햇살에 갸우뚱 고개를 내미는 꽃들도 어여쁘지만, 나는 해 질 녘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오순도순 꽃잎을 오므리는 들꽃들의 모양새에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아침 해가 희망을 안고 솟아오른다면, 저녁 해는 우리네 인생처럼 하루치의 고단함을 묵묵히 품고 서산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먼 타국 베트남 공장의 허름한 담벼락 아래에서 홀로 피어난 작은 이름 없는 꽃 한 송이를 보았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도 굳세게 뿌리를 내린 그 모습이 꼭 고향에 계신 엄마의 주름진 치맛자락 같았고, 고단한 하루 끝에 동네 평상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던 아낙네들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꽃에 수줍게 '보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름 없는 들꽃이어도 모여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면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밟히면 밟힐수록 더 단단하게 땅을 붙잡는 들꽃처럼, 당신과 나 역시 지나온 아픈 계절들을 그렇게 굳세게 견뎌낸 것이겠지요.

지금 밖은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슴속에 고구마처럼 얹혀있던 서러움은 이 노을빛에 살포시 덮어두시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지친 마음을 가만히 지져보셔요.

그리고 먼 훗날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줄 당신에게, 오늘 밤 가만히 안부를 건네봅니다.


"지쳐도 괜찮다, 너는 이미 귀한 이름을 가진 꽃이란다."



"잘 지내고 있니?"

해질녘 서로 기대는 들꽃.png

이미지: AI와 함께 그렸어요


글을 다 읽으셨다면, 이 음악과 함께 잠시 쉬어 가세요

「Nature’s Dialogue」 · truepen


늘 고운 음악으로 함께해 주시는 truepen 님께 감사드립니다.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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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