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어둠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밤이었다.
아랫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통증은 온몸을 뒤틀었다.
“엄마 제발 살려줘요.”
창자가 꼬이는 극심한 고통으로
눈물이 범벅이 된 나는 엄마를 애타게 찾았다.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마룻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나를 보시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엄마는 갑자기 밭으로 뛰어나가셨다.
절구통에 무엇인가를 쿵쿵 찧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뒤 “마시라”며 큰 사발에 담긴
퍼런 녹즙 한잔을 내미셨다.
콧속을 확 후비는 생전 처음 맡은 쓴 냄새,
하지만, “마시면 낫는다”라는 엄마의 말에
앞뒤 가릴 거 없이 들이켰다.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또 다른 고통의 녹즙.
그것은 다름 아닌 익모초즙이었다.
마을에 병원이 없었던 터라 민간요법을 쓰신 것이다.
엄마 무릎을 베개 삼은 나의 배를 쓰다듬으시며,
“우리 아들 낫게 해 주세요”라며,
간절하게 문지르시던 엄마의 손길.
그리고 장독대로 가셔서 정한수 한 그릇을 떠놓고,
간절하고 지극하게 비셨다.
조왕신이 계신다는 부엌 가마솥 위에도
작은 물 한 사발을 올려놓고
거칠어진 두 손을 비비며 간절하게 비셨다.
“자식들이 아프지 않기를”
“멀리 객지생활하는 가족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그렇게 비셨다.
지극히 평범했지만, 위대한 기도였다.
엄마에게 조왕신은 특별한 존재였다.
부엌을 지키는 신.
가족의 먹거리를 바카라임지는 신.
매일 아침 아침밥을 짓기 전.
엄마는 그 조왕신게 마음을 올리셨다.
거창한 의식도, 화려한 내용물도 아니었다.
그저 정한수 한 그릇.
하지만 그 안에는 엄마의 온 마음이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60을 바라보는 아들은,
치매라는 긴 터널을 걷고 있는 엄마와 마주하고 있다.
그 익모초 즙을 절구에 찧으셨던 손은 이제 떨리신다.
마을에서도 깔끔하기로 소문난 엄마셨지만,
그 정한수를 떠 올리시던 정갈한 몸가짐은 이제 흐트러지신다.
혼자서 옷 입는 것도 힘겨워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셨다.
그 간절했던 기도는 이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듯했다.
치매를 앓고 나서 한동안 엄마는 조왕물을 잊으셨다.
부엌에 계셔도 예전처럼 정한수를 올리지 않으셨다.
정한수를 올리는 행위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엄마의 영역이었기에
나 또한 그렇게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팡이를 집고 부엌으로 다가오시더니,
조왕물이 담긴 그릇에 물을 채우시는 것이다.
“엄마 뭐해요!”라고 모른 척 여쭙는 나에게,
엄마는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신다.
조왕신께 정성을 들이는 엄숙한 의식에
잡음을 넣지 말라는 신호 셨다.
그 순간 나는 숨을 죽였다.
엄마의 손이 불안하게 천천히 움직이신다.
물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 쥐시더니, 눈을 감으신다.
입술이 조용히 움직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알 수 있다.
“우리 아들 건강하고 복 많이 주세요”
“우리 가족들 모두 무사하게 해 주세요”
수십 년 전, 익모초즙을 짜주시던 그날 밤과 똑같은 기도였음을.
나는 이 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어제 뭘 드셨는지도 기억 못 하신다.
방금 하신 말도 잊으신다.
하지만, 조왕물을 올리는 행위만큼은 정확하게 재현하셨다.
절차 기억과 몸에 새겨진 습관
뇌과학적에서는 이런 현상을 ‘절차기억’으로 설명한다.
절차기억은 자전거 타기나, 젓가락질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해내는 기억”이다.
기억의 저장창고를 해마라고 하는데,
이 기억은 뇌의 ‘해마’에 저장된 게 아니라
‘소뇌와 기저핵’이라는, 대뇌피질보다 더 오래되고 더 깊은 곳에 저장된다.
치매는 흔히 해마 주변부터 손상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제 무엇을 했는지와 같은 ‘일화기억’이 먼저 흐려진다.
하지만, ‘소뇌와 기저핵’에 새겨진 절차기억은
병이 상당히 진행된 뒤에도 오래 살아남는다.
물을 뜨는 손동작, 자세, 몸짓, 입술을 움직이는 리듬 등.
이 모든 것이 반복되면서 소뇌와 기저핵에 깊이 새겨진 것이다.
편도체, 감정이 기억을 지킨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조왕물 의식이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엄마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 걱정... 등
엄마의 온 정신과 영혼의 감정이 담겨 있다.
감정을 처리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는 치매가 다른 기억을
지워가는 와중에도 비교적 오래 기능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렬한 감정과 결합된 기억일수록 뇌 여러 영역에 겹겹이 저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이나 날짜 같은 사실 정보보다 훨씬 오래 남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암묵기억’이라고 부른다.
의식적으로 떠 올리지 않아도 자동으로 나타나는 기억.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는 기억이다.
엄마의 신앙은 그렇게 암묵적으로 존재했다.
의식은 혼미해져 가고 있지만, 무의식은 여전히 조왕신을 향해 손을 모으셨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엄마에게 조왕신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 지켜온 신념이었고, 매일을 살아가게 한 힘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종종 조왕물을 올리신다.
하지만, 매번 그러시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완전히 잊으신 듯 지나가시기도 한다.
이제는 조용히 지켜본다.
방해하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옆에 있어 드린다.
엄마에게 부엌은 단순한 요리를 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고.
자식의 안녕을 빌고.
사랑을 담아 음식을 만드는 성소였다.
조왕신은 어쩌면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 형상화된 존재였는지 모른다.
이제는 내가 조왕물을 떠 올린다.
평생 해오셨던 엄마의 그 깊은 사랑은 흉내 낼 수 없지만,
엄마가 건강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1. 익숙한 동작을 활용한 반복 운동
그릇 감싸 쥐기, 손 비비기 같은 동작은 소뇌와 기저핵을 자극한다.
새로운 동작을 가르치기보다, 이미 몸이 기억하는 동작을
함께 반복해 보는 것이 환자에게 부담이 적고 성취감을 준다.
2. 양손 협응 운동
물그릇을 감싸는 동작처럼, 양손을 동시에 사용하는
협응 운동은 좌.우뇌의 연결을 돕는다.
작은 물그릇에 물 옮겨 담기, 두 손으로 반죽하기,
손빨래하듯 비비는 동작 등이 이에 해당된다.
3. 리듬과 결합한 신체 활동
음악이나 익숙한 노래를 배경으로 손뼉 치기,
손 흔들기 같은 리듬 운동을 함께 하면 감정기억과
절차기억이 함께 자극되어 더 오래, 더 즐겁게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