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일까. '혐오'라는 용어는 우리 슬롯를 논할 때 절대 배제해서는 안될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인터넷이 만들어 낸 익명의 가면 뒤에 숨을 수 있게 된 덕분일까? 사람들은 마치 호흡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SNS, 유튜브, 뉴스 기사, 인터넷으로 접속할 수 있는 어느 곳을 들어가 봐도, 댓글은 혐오와 분노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혐오, 그리고 분노가 이렇게 가시적인 형태로 떠오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일지 몰라도, 그 감정의 역학(力學)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어떤 개인들은 그 분노를 몸으로 떠안은 채 세상 앞에 서 있었다. 영화 <분노의 주먹> (원제 : Raging Bull) 속 제이크 라모타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분노의 주먹>의 주인공 '제이크 라모타'는 1922년에 태어난 권투 선수이다. 프로 복싱계에 데뷔한 이후 파죽지세의 흐름을 이어가던 그는, 1949년 미들급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한 이력을 가진 제이크를 보면서 관객이 가지는 감정은 동경심이나 부러움이 아니다. 다름 아닌 '분노'이다. 영화의 러닝 타임 내내, 제이크는 항상 분노에 휩싸여 있다. 그는 항상 주변 인물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그것으로 부족한 날에는 폭력까지 휘두른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처음에는 제이크 혼자만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그의 주변 인물들 역시 그 분노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심지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분노가 전염되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분노라는 감정에 전염성이라도 있는 것일까?
분노의 움직임은 불과 닮아있다. 불은 한번 타오르기 시작하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로 움직인다. 제이크가 링 위에 올라, 상대 선수에게 분노의 주먹을 날린다. 그가 분노에 찬 주먹을 상대방을 향해 내지를 때, 그의 분노는 단순히 두 사람 사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분노는 경기장 전체의 공기를 달구며 관중들에게도 서서히 옮겨붙는다. 이윽고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지르고, 더 거센 충돌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누가 처음부터 불이었고 누가 나중에 불이 붙은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분명한 것은 관중 역시 제이크의 분노가 계속 타오르기를 원했다는 사실이다. 제이크가 ‘성난 황소’라면, 그 황소가 끝없이 돌진할 수 있도록 무대를 열어준 투우사 집단은 바로 관중들이었다.
<분노의 주먹>이 조명하는 것은 비단 경기장위에서의 '제이크 라모타'의 모습이 아니다. 카메라는 경기장 밖의 세계에서 그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도 들여다보고 있다. 경기 밖에서도 제이크는 분노에 휩싸여있다. 이 세계에서 그가 표출하는 분노는 그의 가족들을 향한다. 제이크의 첫 아내는 처음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분노가 정말 제이크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대상으로부터 온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 전염의 과정을 더 또렷이 보기 위해 우리는 제이크의 두 번째 아내 비키와, 그의 친동생 조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제이크의 두 번째 아내인 비키를 살펴보자. 처음 제이크가 비키를 만났을 때, 누군가를 집어삼킬 듯이 활활 타오르던 제이크의 분노는 갑자기 온순해진다. 데이트 도중, 두 사람이 함께 하던 게임을 비키가 허무하게 끝냈음에도, 제이크는 화를 내긴커녕 평온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상냥하면서도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제이크에게 비키는 점차 빠져들어간다. 그런데 제이크와 비키가 함께 나오는 두 번째 장면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는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비키를 대하는 제이크의 말투가 명령조, 협박조로 바뀌어 있다. 제이크가 가라앉혀 놓았던 분노가 서서히 그의 바깥으로 삐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후, 잠시 동안 누그러져있던 분노의 불길이 다시 제이크의 몸을 휘감는다.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이 불길은 비키를 정면으로 겨눈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후, 제이크는 비키가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제이크의 계속되는 의심, 그 과정에서 제이크가 가하는 언어적/신체적 폭행까지. 비키는 점점 지쳐간다. 제이크가 처음 비키의 불륜 상대로 의심했던 대상은 조이의 지인들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경계 대상을 확대해 나가던 제이크의 레이더망에 그의 친동생 조이가 들어오게 된다.
조이는 제이크의 매니저 역할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그보다 낮은 온도의 분노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고온의 물체 옆에 오래 서 있으면, 결국 그 열기가 몸으로 번져오기 마련이다. 제이크의 곁에서 오랫동안 그의 분노를 정면에서 받아줘야만 했던 조이 역시, 점점 제이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가족에게 괜한 화를 내고, 비키가 자신의 친구들과 외도를 하고 있다고 의심해 친구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조이를 둘러싼 분노의 화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른다.
오랫동안 제이크가 뿜어내는 분노의 불길 속에 서있던 조이와 비키는, 점차 지쳐가는 스스로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제이크의 분노는 그칠 줄 몰랐고, 마침내 그는 조이가 비키와 외도를 저지르고 있다 의심하여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이제 조이와 비키는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더 이상 제이크의 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결국 두 사람은 제이크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 제이크는 챔피언도, 복싱 선수도 아니다. 제이크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그를 떠난 상태이다. 조이도, 비키도, 제이크의 자녀들도 그와 함께하지 않는다. 항상 주변 인물을 분노의 화염으로 태워오면서 분노를 유지해 왔던 그에게, 홀로 남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달리 태울 대상을 찾지 못한 제이크는, 마침내 스스로를 태워버리기로 결정한다. 분노의 종착역은 결국 자기 파괴이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신체를 분노의 장작으로 집어넣는다. 선수시절 체중관리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은퇴 이후 몸 관리를 완전히 놓아버리고 배 나온 아저씨가 된다. 그의 자기 파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은퇴 이후, 제이크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운영하던 클럽에서, 14세 소녀가 일했다는 것이 경찰에게 적발된다. 수감될 위기에 처한 그는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챔피언 벨트를 부숴 그 안의 보석을 팔아버린다. 자신의 명예로웠던 과거를 상징하는 물건마저 스스로의 손으로 없애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보석금을 다 마련하지 못한 제이크는 결국 수감되고 만다. 그는 감옥 벽을 때리며 마구 울부짖는다. 자신의 주변인물들도, 스스로의 신체와 명예도, 모두 불태워버린 그에게는 이제 파괴할 대상도 남지 않았다. 불태울 대상을 잃어버린 화염은 스스로 사라진다. 그제야 제이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고, 본인이 벌인 일들을 후회하게 된다. 모든 것을 다 파괴해 버린 뒤에야.
분노에 맞서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로 분노에 맞서는 사람은 이미 자신도 그와 똑같아지는 것을 허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분노의 주먹>이 끝내 보여주는 것은, 분노를 정면으로 폭발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 불길이 어떻게 번지고, 어떤 방식으로 소모되는지 끝까지 지켜보는 일의 중요성이다. 제이크 라모타가 자신의 몸을 거의 소진해 버린 뒤에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것은 승리의 환희가 아니라,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서 감지되는 뒤늦은 깨달음이다. 앞서 말했듯이, 모두가 분노로 차있는 이 세상에서, 쉬운 선택은 스스로의 몸을 분노의 불길에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을 때 우리는 전소(全燒)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분노의 화염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imdb.com/title/tt0081398/mediaindex/?ref_=mv_close
참조 : 혐오슬롯, 카롤린 엠케, 다산초당
https://www.cinephile.kr/news/articleView.html?idxno=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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