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by페이지 성희



비어 있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명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공망(空亡)’이라는 말을 만나게 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비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왠지 좋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 무엇인가 비어 있다면 부족한 것이고, 부족하다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얼마 전 사주를 공부하다가 시지가 공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사주에서 일지 을축일의 공망은 술해(戌亥)이고, 내 시지에는 亥가 자리하고 있다.


시지는 전통적으로 자녀, 말년의 삶, 앞으로의 방향과 내가 살아가며 만들어갈 미래 등을 살펴보는 자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지가 공망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처음에는 ‘비어 있다’는 말에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공망을 공부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공망을 반드시 흉한 것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어떤 것이 정해진 모습 그대로 드러나기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채워갈 수 있는 자리로 볼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하니 문득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예전보다 지금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하고 있다.

바카라을 읽고, 영화를 보며, 음악과 명리학을 공부하고, 그렇게 얻은 것들을 토대로 글을 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남기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니, 여전히 그럴 마음도 없다.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지나온 시간을 다시 이해하게 되고,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마음을 새롭게 만날 때가 있다. 내가 가진 상처와 경험도 글 속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를 얻는다.


어쩌면 나에게 글쓰기가 공망인지도 모르겠다.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일이 글쓰기가 되어가고 있다.

공망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살아가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그 빈자리에 무엇을 채우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열려 있는 미지의 영역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도 그런 게 많다.

젊을 때는 무엇인가 정해져 있고 가득 채워져 있어야 안심했다.

직업도, 관계도, 미래도 빈틈없이 채워져 있어야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살아보니 인생에는 끝까지 답이 정해지지 않는 자리도 있었다.

오히려 그 빈자리 덕분에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늦은 나이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기도 한다.


비어 있다는 것은 반드시 부족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주어진 답으로 채우는 삶보다, 살아온 경험과 배움으로 스스로 채워가는 삶.


내게 공망은 이제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명리학에서 공망을 이렇게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주 전체의 구조와 오행의 강약, 다른 글자와의 관계에 따라 해석은 달라진다.

그렇다고 공망 하나만으로 삶의 좋고 나쁨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내 사주의 공망을 공부하며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비어 있는 자리가 있다고 해서, 내 삶까지 비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미 채워진 곳보다 아직 비어 있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삶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난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가능성과 희망이라는 등불이 우리 앞의 길을 비춰준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슴 뛰는 나날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등불 하나만 있다면, 오래도록 생기를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 빈자리에 무엇을 담을지는 결국 살아가는 사람의 몫이다.


나는 앞으로도 배우고, 생각하고, 쓰면서 그 자리를 조금씩 채워가고 싶다.

내가 살아온 시간으로.

그리고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으로.


나에게 건네는 한마디.

“너에게 비어 있는 자리가 있어도 괜찮아.

아직 네가 채워갈 것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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