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여행 후 달라진 것들
마드리드 한인 숙소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혼자 여행 중이었으며, 일정의 중간쯤에 있다고 했다.
내일이면 나는 스페인을 떠날 예정이므로, 아직 몇 회의 탑승이 유효한 교통패스를 그녀에게 쓰라며 건네주었다. 그녀가 나의 일정을 묻는다. 나에게는 세고비아 당일관광이 마지막 일정으로 남아있었다. 여행정보를 나누는 짧은 대화였지만 그녀의 말투와 사용하는 단어, 몸짓과 표정에서 다부진 성격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혼자 여행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혼자 하는 배낭여행을 일찍이 20대에 했었더라면, 나도 애초에 자신감 하나는 갖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그녀를 통해 느껴졌다.
세고비아는 한국의 기타 브랜드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스페인에 세고비아라는 마을이 있고, 그곳의 알카자르(성)는 디즈니성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세고비아 기타와 관련이 있는지는 근거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람이 만들었다는 거대한 수로는 마치 우주인이 지구에 날아와 세워놓은 듯 그 엄청난 크기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엉성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과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그와 같은 단단함을 갖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 걸까?
나는 얼마큼을 더 살아야 세상사의 유혹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크고 작은 삶의 격량을 묵묵히 이겨내고 나를 지켜낼 수 있는 걸까?
알카자르를 배경으로 잠시 디즈니성의 명랑 공주가 되어 사진을 찍고, 점심으로 꽤 괜찮은 메뉴 델 디아를 먹을 수 있는 행운까지 누렸으니 여행 마지막날을 잘 마무리한 셈이 되었다.
다음 날, 스페인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난생처음 해본 '혼자 여행'이라는 도전에 용기를 낸 나에게 박수를 보내며 셀프 사진을 찍어본다. 여행을 시작할 때의 나와, 끝내고 돌아가는 나는 많이 달라 보인다.
공항에 마중 나온 남편이 꽃다발을 건네며 어색한 웃음으로 나를 반긴다. 2주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화려한 꽃송이들 사이에서도 어딘가 위축되고 불안해 보였다.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는 남편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까지 한다. 고분고분하고 온순한 아내가 감히 혼자 낯선 곳으로 훌훌 떠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당찬 아내를 보며 남편은 지금 우리의 관계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심각하게 이혼요구를 한 적이 있다. 결혼한 지 이미 32년이 지난 후였고, 스페인으로 떠나기 8개월 전이었다. 내가 바라던 결혼생활은 독립된 두 성인이 배우자로서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함께 걸어가는 삶이었다. 남편을 존중하고 아끼면 남편도 나를 그렇게 대할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어려운 것이었을까? 나는 점점 배우자라기보다는 남편의 응석받이가 되어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위해 존재하는 쓸모 있는 도구라는 생각만 짙어졌다.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와 남편에게 알렸지만, 그는 나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며 완강하게 이혼을 반대했다. 대신, 본인이 시간을 갖고 잘못된 점들을 고칠 것이며 변하겠노라 애원했다. 나는 과연 남편의 강력한 반대를 꺾고 이혼의 산을 넘을 수 있을까? 오랜 시간에 걸쳐 학습된 무력감이 은근하게 나를 압박했다. 이혼이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과, 나 스스로도 다시 한번 마지막 최선을 다 해보자라는 생각, 결정적으로 우리의 이혼이 다 큰 아이들에게 상처와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내 결심을 흔들었다. 결국 이혼집행유예 1년이라는 모호한 선택을 내렸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 속에는 남편에 대한 연민이 숨어있었다.
남편은 자기표현에 서투르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나눈 대화는 '그래서 얼마면 돼?'가 전부였다. 대화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관계를 형성할 줄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인 개그로 만들어 상대를 날카롭게 공격하는데, 이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그의 생존방식이라는 것을 나도 나중에 알았다. 그에게 대화는, 먼저 상처를 주느냐, 아니면 상처를 받느냐 하는 공격과 방어일 뿐이었다.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지만, 냉정한 부모 아래에서 정을 주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남편의 떨리는 손가락을 보는 순간, 이 남자도 사느라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과연 옳기만 했을까?
2주간의 여행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공허함이 채워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가여운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번지점프대를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죽을 용기를 내어 혼자 떠났으나 오히려 많은 것을 채우고 무사히 살아 돌아온 여행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결연한 다짐을 해본다.
첫째, 가정과 나의 우선순위에서,
이제는 나를 아프게 하는 희생과 헌신을 지워버린다. 나 자신도 없이 희생과 헌신만 하다가 헌신짝처럼 되어버리는 가여운 엄마들의 세대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보다는 즐겁게 살기로 한다. 무엇이건 즐겁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 않을 것이며, 우선 열심히 하기 전에 나는 즐거운가?를 묻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남편과 다시 한번 잘 살아보기로 한다. 나는 이제 언제든 혼자 떠날 수 있는 여자가 되었으니, 헤어짐은 꼭 지금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 그때 고비를 잘 넘겼다는 것과, 부부의 인연은 부모 자식의 인연보다 더 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에 와서 한다.)
이 글을 끝으로 온라인카지노북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제 여행기를 읽어주시고 따뜻한 격려와 응원의 댓글을 주신 모든 작가님들과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온라인카지노에서 지금처럼 오래도록 만나고 싶습니다.
특별히, 1화에서 어린 제 자신과 만나는 뜨거운 자기 발견의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 주신 붕어만세 작가님께 정말 커다란 위로를 받았습니다. 엎드려 큰 절을 올리고 싶을 만큼 감사합니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붕어만세 작가님의 글을 옮겨봅니다.
** 또한, 제 글을 자신의 온라인카지노에 소개해주신 여행 크리에이터 Joanna 작가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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