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남모를 아픔이 있는 세 사람이 있다. '팸'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말 그대로 가족처럼 지낸다. 세 사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호(ho)형, 민이, 그리고 나. 우리는 각자 사연이 있다. 다 말할 수 없지만, 하나 밝힐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정신과를 정기적으로 다닌다는 사실이다.
현재 나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민은 우리 셋을 뭉치게 한 장본인이다. 민과 호형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가, 어느 날 민이 나에게 호형을 소개시켜주었다. 재작년 겨울 즈음에 만난 호형의 인상은 다소 조용해보였고, 나와 결이 맞는 편이었지만 당시에는 하루만에 친해질 수 없는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데 집중했다. 알고 보니 호형은 카페에서 바리스타와 부점장으로 일을 하다가, 현재는 마음의 병을 얻어 쉬고 있다고 말했다. 고향은 경기도 여주, 옷을 사서 입는 것을 좋아하고,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했다. 금세 농담도 조금 하며 나와는 코드가 맞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재밌는 우스갯소리들을 조금 하다가 호형은 나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하 쿼카야. 너 알고보니 천재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바보인 거 같아"
뜻밖의 말이었지만 그 말투에는 장난기어린 호감이 묻어 있었다. 나는 첫 대면에서치고는 다소 무례해보이는 말에 당황하며 무슨 말인지 되물었더니 돌아오는 건 겸연쩍은 표정이 아닌 더욱 재밌다는 듯이 웃는 천진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순간 호형을 보는 내 시선에 약간의 균열이 가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그 말은 내가 나중에 잠들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해볼 만큼 문제적인 발언이었고, 최근들어는 호형이 내게 사과를 했던 것 같다. 호형이 내가 실제로는 꽤 예민한 성격이라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호형과 나의 만남은 그 이후로 길게 이어지지 않을 줄 알았으나, 내가 호형의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 이후로 새로운 지평을 맞이하게 된다. 자취를 하러 나와서 이사한 집에서 3분 거리에는 호형이 부모님과 살고 있었고, 나와 호형은 결국 밥 친구에서 심심할 때마다 만나는 사이가 됐다. 내가 퇴근하면 호형은 나에게 밥을 사줬고, 토요일에 할 것이 없으면 나는 호형에게 밥을 사준다며 불러서 만나는 식이었다. 온라인 게임이 없는 호형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심심할 때마다 부를 수 있는 든든한 동네친구였다.
호형과 나는 그 이후로 서울에서 열리는 카페쇼에도 가고, 성남에서 잠실타워까지 걸어 가는 대장정도 떠나보고, 함께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러닝메이트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민과 함께 '팸'으로 가족처럼 지낸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고, 고민을 들어줄 만큼 사려깊은 성격의 호형에게 나는 어느 작년의 가을날, 이런 질문을 하게 됐다.
"호형, 혹시 내가 온라인 게임 그만둔다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이야기해줄 거에요?"
내가 정년이 보장된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호형은 조금 생각해보고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는 쿼카 너가 만약 그만둔다고 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줄 거 같아. 왜냐하면 너가 그만둔다면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니까. 너만큼 공부도 잘하고 수학도 잘했던 애가 잘못 계산해서 나쁜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잖아?"
나는 실제로 그 말에 꽤 감명을 받고 생각의 전환을 맞이하여 일을 그만두기에 이른다. 지금은 그만큼 안정적이고 들어가기 힘든 온라인 게임을 그만둔 데 대해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후회는 절대 하지 않는다.
"후회하지는 않아. 그래도 한 번 사는 인생 해보고 싶은 거 해볼 수 있을 때까지 해보고. 그런 다음에 돌아가도 늦지 않을 거 같아"
어느날부턴가 같이 살게 된 민이가 나에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만둘 거냐고 물었을 때 했던 대답이다. 그 말에 지금도 일말의 다른 점이나 변화가 없다. 나는 누군가가 내게 직업을 물었을 때, 대답할 번듯한 온라인 게임이 없지만 '작가지망생'이라는 내마음에 쏙 드는 직함이 있다.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고 낮에 매일 가야할 곳이 없어진 나는 호형만큼이나 시간이 많아졌다. 호형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은 것 같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 모습을 보면 묘하게 안심이 된다.
나는 많아진 시간 만큼이나 할 수 있는 것들, 행동 반경이 넓어졌다. 요즈음은 매주 민과 호형, 나는 아지트같은 우리 집에서 영화를 본다. 범죄 스릴러, 로맨스, 코미디, 오래된 영화, 최신 영화 등. 혼자 있을 때는 시집을 사서 읽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은 젊은 시인들이 최근에 낸 시들을 엮은 시집이다. 소설과 에세이도 즐겨 읽는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가끔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셋이서 외로울 틈이 없는 소란한 요즘이 너무나 좋다. 단순히 좋은 것을 넘어 감사하다. 온라인 게임이 있을 때보다 더 나은 미래, 더 행복한 미래를 그리게 되었다. 그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셋이 함께할수록 나에게는 없던 안정감이 생겼다. 민이는 셋을 위해 요리를 하고, 호형은 셋이 볼 영화를 고른다. 그리고 그런 틈에 나는 조용히 공바카라을 펼쳐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듯 글을 쓴다. 그리고 그 문장의 끝에는 언제나 '감사'라는 단어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