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통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강산은 번들거리는 통을 세제로 씻었다. 빈 통은 돌려줘야 했고, 돌려주려면 자신이 먼저 옆집 여자에게 다가가야 했다. 잠시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그려보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녀가 먼저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렇지만 그녀가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주말, 결국 그는 반찬통을 들고 704호 앞에 섰다. 한참을 망설이다 푸른색 종 모양이 그려진 단추에 손가락을 올렸다.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네.’라는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거··· 돌려드리려고요.”
그녀의 시선이 강산의 손에 들린 반찬통에 닿았다.
“아, 반찬통이요?”
“네.”
그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바빠서 가지러 가겠다고 말씀드린다는 걸 깜박했어요. 요즘 거의 매일 야근했거든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반찬통을 받아 들며 물었다.
“입에는 맞았어요?”
강산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마, 맛있었어요.”
“다행이네요!” 그녀의 미소가 한층 더 깊게 피어났다. “요즘 요리하는 데 재미를 붙여서요,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늘 양 조절에 실패해요. 아마 저 혼자 다 먹으려면 일주일은 걸렸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계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무지(無知)가 강산의 숨을 막히게 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산은 그녀를 지나쳐 703호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잠깐만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강산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손목, 다치신 거예요?”
그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산한 소리가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녀가 다시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즘 날이 건조해서 상처가 한 번 생기면 잘 안 나아요. 연고 꼭 바르세요.”
강산은 그녀의 손에 들린 연고와 반창고를 내려다보았다.
“저, 괜찮아요.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이웃끼리 나누는 게 대수인가요?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말아요.”
그녀가 강산의 손에 연고와 반창고를 쥐여 주었다.
“… 감사합니다.”
그는 집에 돌아왔다. 손바닥 안의 연고와 반창고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저 여자는 뭘 믿고 저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미 흉이 진 상처에 연고를 바른다고 해서 바로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반창고 위에서 웃고 있었다.
“유치하게.”
그는 힘없는 웃음을 뱉었다. 그러다 문득, 이 웃음이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일요일 저녁. 그는 현관에 쌓여 있던 택배 상자를 카트에 싣고 공동현관을 나섰다. 택배 상자에서 테이프를 뜯어내 버리고, 납작하게 펴진 상자를 상자 버리는 곳에 던져놓았다. 네 번을 반복하자 카트가 비었다. 다시 몸을 돌려 공동현관에 발을 들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의 코끝에 진한 알코올 향이 스몄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공동현관을 바라보았다.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다가올수록 알코올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남자는 꼬부라진 혀로 뭐라 중얼거리며 벽을 한 손으로 짚고 위태롭게 서 있었다. 강산은 거리를 벌렸다.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재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 버튼을 눌렀다. 거의 기다시피 엘리베이터에 오른 남자는 6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작동음만이 귀를 채웠다.
4층을 지날 무렵, 남자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강산은 더욱 구석에 붙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디서 봤는데.”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강산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강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층수를 나타내는 숫자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5층을 지났다.
“너, 이강산이지?”
강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 도착했지만 남자는 내리지 않았다. 그는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킥킥 웃었다.
“맞네, 그 사람 죽인 놈.”
7층. 강산은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갔다. 그러나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이 더 빨랐다. 그는 강산의 옷깃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강산의 두 발이 허공에 떴다. 빠져나오기 위해 바르작거렸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딜 쥐새끼처럼 도망가려고.” 남자가 강산을 벽으로 밀쳤다. 강산의 등이 세게 부딪혔다.
“사람 하나 죽여놓고, 여기서 세끼 꼬박꼬박 처먹으면서 편하게 살고 있었어?”
“죄, 죄송….”
“죄송하면 기어 나오지를 마, 이 새끼야.”
남자의 억센 손이 허공을 갈랐다. 한 번, 두 번. 강산은 뺨을 감싸 쥐었다.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차가운 복도에 나동그라진 그의 꼴을 보고 남자는 조소를 날렸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열렸고, 그는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강산은 몸을 일으켰다. 왼쪽 뺨이 얼얼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역시 살 자격이 없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사람들은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인다. 아마 옆집 여자도 똑같을 것이다.
다음날,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 기사였다. 강산은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몸을 숙여 얼음팩이 담긴 상자를 끌고 들어가려는데, 오른편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또 옆집 여자였다.
“…어?”
강산은 한 손으로 뺨을 가렸다.
“얼굴이 왜 그래요?”
“괜찮아요.”
“아니, 잠깐만요. 진짜 많이 부었….”
“괜찮다니까요.”
쾅! 703호의 문이 닫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뭐가 문제지?”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텁텁한 감정 속에서 식탁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지난번 손목도 그렇고, 내가 너무 집요했나….”
그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 펜을 꺼내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703호의 문에 붙여놓고 집을 나섰다.
'자꾸 캐물어서 미안해요. 얼굴을 다친 것 같아 걱정되어서 그랬어요. 불편하면 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704호-'
강산이 메모지를 발견한 것은 저녁쯤이었다.
‘착한 척하기는.’
그는 메모지를 구기려 했다. 그러나 구길 수 없었다. 반듯한 글씨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결국 메모지를 두 번 접어 서랍에 넣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