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가 가진 힘
어릴 적 성당에 가면 느껴지는 고요함이 좋았다. 미사에 참여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래서인지 여행지에 가면 성당에 들어가 보곤 했다. 어떤 곳에 가면 유독 마음이 편해진다던가, 어떤 장소에 가면 갑자기 글이 잘 써지는 경우가 있다. 장소가 주는 힘이 있는 걸까? 그런 분위기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조도의 차이, 들려오는 소리의 차이, 향기의 차이일까?
얼마 전 바카라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보았다. 장소의 층고가 높으면 그만큼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미네소타대 연구진이 진행한 대성당 효과(cathedral effect)라는 연구가 나온다. 천장 높이를 약 3m와 약 2.4m로 바꿔가며 진행된 실험이다. 높은 천장에 있던 참가자들은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묶어 보는 추상적이며 관계적인 사고를 더 많이 했고, 낮은 천장에서는 세부 항목에 집중하는 구체적이고 항목 중심적인 사고가 우세했다. 결과적으로 "천장이 높으면 더 창의적이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게 된 날이었다. 매일 글을 쓰던 카페나 도서관은 가기 싫고, 그렇다고 일찍 집에 들어가 아이들과 집안일을 마주하기도 싫은 날. 느릿느릿 걷다가 동네 놀이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 단지였기에 늘 보던 곳이었지만 그냥 지나쳤던 곳이었다. 이제 막 관리처분 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니 연식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놀이터는 어릴 적 보던 놀이터 느낌 그대로다(물론 모래가 아닌 우레탄으로 덮여있었지만). 작은 그네 두 개와 오래된 시소, 그리고 미끄럼틀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내 무릎보다 낮게 위치한 벤치에 앉았다.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고, 간간이 한 명씩 오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휘몰아친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덮치기도 하고, 어제 있었던 사소한 일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미처 붙잡지 못하고 흩어졌던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 텅 빈 화면 앞에 앉아있으면 막막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겨우겨우 글 하나를 끝냈는데 또 써야 한다니. 뭘 써야 할지, 어떤 얼개로 작성해야 할지,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는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시작하는 게 좋을지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그런데 놀이터에 앉아 하늘도 보고, 그네도 타다 보니 갑자기 쓸 이야기가 떠오른다. 핸드폰 파일을 열자 글이 계속 이어진다. 내가 하는 말인지, 누군가가 하라고 들려주고 있는 말인지 헷갈릴 정도다. 일단 쓰고 고치자는 생각으로 아무 제약 없이 써 내려갔다. 그렇게 적은 글을 집에 와서 조금 손봐 마무리했다. 그렇게 내 첫 종이바카라의 에필로그가 될 내용은 만들어졌다.
예전에 위대한 선구자들은 산바카라을 즐겼다고 한다. 칸트가 산바카라하는 걸 보고 사람들이 시간을 알 수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무라카미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바카라까지 냈다. 그래서일까? 나도 달리기를 하다 고민하던 문제의 해결바카라이 떠오를 때가 몇 번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진척이 없던 문제가 갑자기 실타래가 풀리듯 풀린다.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정신 또한 물질이고 따라서 정신 활동 자체를 치료하면 정신을 담고 있는 몸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실제로 정신이 몸을 지배하게 할 수 있다.
<기억을 바꾸는 법>, 스티브 라미레스, 238p
이처럼 우리의 몸과 정신은 각각 따로가 아니다.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몸을 움직이는데서 오기도 하고, 신체적인 문제 역시 사고체계를 바꾸는 것에서 변화하기도 한다. 그러니 때로는 내가 보고 있는 것에서 한 발짝 떨어져, 기어코 해내겠다는 이 악물고 달리는 것을 그만두고 잠시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쉬게 하는 것이 현명한 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