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전화를 했다.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갔다고 했다. 경찰차를 얻어 타고 병원으로 갔다. 난생처음 타보는 경찰차였다.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흥분됐다.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오다 사고를 냈다. 늘 그렇듯 술 한잔을 걸치고 오타바이를 몰았고 달리는 자동차를 박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나가떨어져 크게 다쳤다. 아버지의 발과 같은 88 오토바이는 구하지 못했다. 오토바이의 희생으로 다행히 아버지의 다리는 무사했다.
상대 차는 조금 부서졌고 운전자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가 보았다.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자동차 운전자는 선처를 해줬다 한다. 뭘 어떻게 선처를 해줬는지는 모른다.
여전히 아버지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멋지게 높은 코가 팍 비틀어져 있었다. 코보다 심각한 건 팔이었다. 아버지는 두 팔을 움직이지 못했다. 어깨뼈가 부러지고 쇄골이 끊어졌다고 했다.
퇴원 후에도 오른팔을 쓸 수 없었다. 당장 한 해 농사가 걱정이었다. 언니가 농사일을 거들기로 하고 휴학했다. 명주 언니는 몇 날 며칠 조용히 울었다. 거무튀튀한 언니 얼굴에 더욱 짙은 그늘이 생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언니는 휴학이 아니라 자퇴를 했다고 했다. 그냥 휴학을 할 것이지 왜 자퇴를 했냐고 하니, 그럼 미련이 남을 것 같아 그랬다고 했다. 아버지가 팔을 평생 못 쓸 줄 알았다나. 사실 우리 가족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체의 회복력이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아버지는 두 해가 지나면서 두 팔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명주 언니만이 두고두고 학교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길로 언니는 집순이가 되었다. 집안 살림을 비롯해 농사일, 과수원일을 도맡아 했다. 새로 산 88 오토바이의 아버지 뒷자리 타고 다녔다. 경운기 옆에, 뒤에 타고 논밭으로 따라다녔다. 아침에도 일하고 점심에도 일하고 저녁에도 일했다.
알바를 하면 월급을 받아 집에 죄다 갖다 바쳤다. 나중에는 아버지가 해안가 도로 옆에 포장마차를 차려줬다. 은박지에 싸인 고갈비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언니는 새벽녘이 되어 일이 끝나면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을 걸어 다녔어. 한 번은 택시를 타고 집에 왔는데 아빠가 화를 내며 혼내는 거야.
언니는 그 시절이 억울하다며 말하곤 했다. 아버지에게 된통 혼난 후로 언니는 절대 택시 같은 건 타지 않았다. 그렇게 언니는 일만 하다 집을 나갔다.
반 아이들 중 가출해 한동안 학교에 안 나오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언니가 집을 나가고 나니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명주 언니가 없으니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 일을 다 할 내가 아니었다. 여우의 대변인이었던 나는 그 해 가을 자랑스럽게 독립을 선언했다. 집이 멀어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두 번이나 타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니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순순히 나를 보내주었다. 아버지가 농사 지어 학교 보내 줄 자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내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88 오토바이 뒤에 나와 이불과 밥솥 등을 실어 방까지 날라주었다.
나의 가출을 독립이라 번듯하게 포장하며 공개적으로 집에서 탈출했다. 독립이란 경제적 독립도 함께 의미했다. 내 나이 스무 살이었다.
공동 화장실과 공동 샤워장이 있는 단칸방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성인 둘이 누우면 딱 맞는 크기의 방이었다. 그래도 취사가 가능한 방이었다. 한 칸짜리 작은 싱크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물도 잘 나왔다. 싱크대 위에 버너 하나를 놓고 음식을 해 먹었다. 처음 며칠 동안 가스버너를 켤 줄 몰라 고생했다. 쉬익 하는 소리에 놀라 가스버너가 터질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나중에 언니와 연락이 되었다. 독립한 둘이 만나 번듯한 원룸으로 이사했다. 원룸이란 신세계였다. 보증금을 조금 더, 엄청 많이 얹어줘야 했다. 그리고 다달이 단칸방 두 배의 방세를 내야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원룸이었다. 방 안에 좁디좁았지만 욕실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허름하게 살아도, 없이 살아도 지켜야 할 무언가가 늘 있기 마련이다.
언니는 마트에서 일했다. 나는 학교에 다니다 휴학을 했다. 언니는 자퇴를 해서 다니지도 못하는 학교인데 나는 과가 마음에 안 들어 재수를 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다른 도시로 가고자 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마음을 꽉 잡기를 바랐다. 그래서 심리학과를 택했다.
그러나 집에서 독립이라는 이름을 걸고 내가 벌어 내가 다니겠다 선언한 이상 생활비며 타 도시로 갈 비용은 모두 내가 벌어야 했다. 그렇게 나의 본격적인 알바 생활이 시작되었다.
막 스물이 된 나와 스물한 살의 명주 언니. 우리는 그렇게 독립했다. 일이 싫어서 독립했으나 그 이후에도 이전에도 일을 놓은 적은 없다.
일이란 무엇인가. 일이란 참으로 애증의 단어다. 10대에는 아버지가 시키는 하기 싫은 일이었다. 집을 나와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한 이후 20대의 우리에게 일이란 먹고사는 절박한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