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풍경이 거기에

아마도 기억은 그런 것 인지도 모른다

by현월안




형제자매들과 시간을 맞추어 고향집에 갔다. 고향집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그곳에는 나의 기억이 있고 부모님의 체취가 묻어있는 곳. 그 옛날 밥 짓는 냄새가 골목으로 흘러나오고, 마당 한쪽에서는 엄마가 나물을 다듬고, 해가 기울면 식구들이 엄마품으로 돌아오던 곳이다. 이제는 부모님이 모두 안 계신다. 그러나 고향집은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 맏이인 남동생이 그 자리에 새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형제자매들은 일 년에 몇 번씩 서로 시간을 맞추어 고향집을 찾는다.



고향은 떠나온 지 오래되었는데도 그곳에 가면 오래전 내가 다시 나타난다. 지금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어린 시절의 얼굴을 가진 내가 골목 어딘가에서 뛰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고향마을은 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길은 더 반듯해지고 집들은 새로 지어진다. 예전의 낮은 담장과 낡은 대문은 사라지고, 비슷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들어선다. 누가 사는 집인지조차 쉽게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마을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간다. 사람이 떠나고 집이 바뀌고 길이 넓어지고 나무가 자란다. 기억 속에서는 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도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다행히 고향집 뒤뜰에 엄마를 기억하는 나무가 몇 그루 그대로 남아있다. 그중에 대추나무다. 오래전 엄마가 심었던 나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대추나무는 이제 제법 늙었다. 줄기는 굵어졌고 가지는 여기저기 굽어 있다. 그런데도 올해 유난히 대추가 많이 열렸다. 가지마다 붉고 탐스러운 대추알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실바람 한 줄기가 지나갈 때마다 잎사귀가 살랑이고, 그 사이로 대추알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참 동안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엄마를 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안 계시지만,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엄마가 심은 나무가 해마다 싹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대추나무 앞에 모였다. 누군가는 대추를 따서 맛을 보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또 사랑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다. 서로의 말 사이로 오래된 시간이 흘러나왔다.



아마 기억이라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떠난 사람이 남겨놓은 것을 바라보며 잠시 그 품 곁으로 돌아가는 것. 대추나무 옆에는 잘 익어가고 있는 무화과나무가 있다. 그 옆에는 묵묵히 서 있는 석류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는 동백나무가 있다. 모두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심은 나무다. 엄마는 아마 그 나무들이 이렇게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유난히 꽃나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서 봄이 오면 꽃을 보고 싶었고, 가을이면 열매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뜰이 푸르고 예쁜 엄마의 꽃동산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은 나이 들어가면서 많은 것을 잃는다. 부모를 잃고 가족을 잃고, 익숙했던 것을 잃고, 때로는 젊은 날의 나 자신을 잃는다. 그러는 사이에 나무는 한 해를 견디며 줄기를 굵게 한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겨울이면 잎을 떨군다. 그러면서 봄이 오면 다시 잎을 내고, 제철이 되면 꽃을 피우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어느새 나이를 많이 먹었다. 이제는 한 해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만나면 부모님을 추억하고 건강 이야기를 하고, 삶 이야기를 하고, 자식 이야기를 한다.



무엇으로도 비할 수 없는 고향의 따뜻한 품. 고향집 넓은 뒤뜰에 앉아 턱을 괴고 있으면 마음이 느슨해진다. 그저 엄마의 손길이 한때 머물렀던 나무 아래에 서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기다리던 아이들처럼, 엄마가 따준 대추를 받아 들고 웃던 아이들처럼, 아무 걱정 없이 나이를 먹어간다. 그렇게 고향 뒤뜰에 있는 나무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다시 어린 시절로 데려다준다.



어느 해였을까. 엄마가 익은 대추를 주우며 두 손으로 호호 불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 손을 잡을 수도 없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엄마를 기억으로만 품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고향집에 가면 나무 하나, 엄마가 남겨 둔 그릇 하나, 담장 한 귀퉁이에도 오래 눈길이 머문다. 바람이 지나가고, 잎사귀가 흔들리고, 붉은 대추 몇 알이 햇빛 아래서 가만히 빛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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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대추나무는 우리보다 먼저 마음을 알아보고, 편안하게 기억을 준다. 엄마는 안 계시지만 엄마가 심어 둔 나무는 남아 있다. 그렇게 시월의 하늘은 맑고 높다. 붉은 대추가 햇빛을 받아 익어가고, 대추나무 나무 사이로 가을바람이 천천히 지나간다. 형제자매들은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나이를 잊고, 세월을 잊고, 떠나온 시간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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