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서 도망치기 위해 바쁨을 선택했는가?

‘바쁘다’라는 방어기제

by아마토르

손가락은 어느 순간 리듬을 기억했다.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타닥타닥, 소리는 일정했고 끊기지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묘한 안정감이 생겼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착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그 감각을 꽤 오래 좋아했다.


그렇게 모니터를 오래 보고 있으면, 숫자들이 얼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엑셀 칸 하나하나가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라기보다, 그 안에 내 하루가 갇혀 있다는 기분이랄까. 칸을 채우는 일은 단순했다. 비어 있는 곳에 수식을 넣고, 틀린 곳을 찾아 고치고, 맞춰진 숫자를 보며 안도했다.


20년 가까이 같은 일을 하면서 ‘완료’라는 단어를 수없이 눌렀다. 마감 직전에 맞춰 넣은 숫자들이 화면에 정렬되는 모습을 보면 시원했다. 그런데 그 시원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따라왔다. 무언가를 끝냈는데, 끝난 느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주 바쁘다고 말한다. 안부를 묻는 말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한다.

“요즘 좀 바빠.”

이 말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 설명하기 귀찮은 마음도, 뒤처진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기분도, 그리고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덮어두려는 의도까지 말이다.


나도 그랬다. “한가하다”는 말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의 무쓸모를 고백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바쁘게 지냈다. 일이 없어도 만들었고, 약속이 없어도 채워 넣었다. 시간이 비어 있는 상태를 그냥 두는 건 더 불편했다.


어느 주말, 집을 나와 사무실로 갔다. 20분 남짓 걸리는 거리. 주차장에서 나와 비슷한 '바쁨 호소인'의 차들이 나를 맞이했다. 인사를 하려다 말고 그냥 자리로 올라가 노트북을 켰다.


보류해 둔 결재 문서를 다시 열었다. 증빙을 보완하라는 메모를 남기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설명을 듣기 위해 미팅을 잡기로 표시해 두었다. 그다음 이메일을 열어 월요일 회의 안건을 정리했다. 의견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흘렀다. 한 것에 비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있었다.


머리를 식히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눈앞에 L타워가 보였다. 가만히 서 있는데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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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가치를 탐구하는 라이프 코치. 마음챙김, 자기이해, 가치 중심의 삶을 주제로 글을 쓰고 코칭하며,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시 연결되도록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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