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만족을 위해 나를 지워온 시간들
집단의 안녕을 위해 제물로 바쳐진 개인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성인(成人)'이 되기 위한 예비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그 교육의 본질은 정서적 독립이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순종'에 맞춰져 있다. 특히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미명 아래 '천륜'과 '도리'를 중시해 온 우리 슬롯에서, 착한 아이는 부모와 공동체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가장 먼저 포기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1. 착한 아이를 둔 어른들의 가차 없는 요구
착한 아이를 둔 부모나 어른들은 관대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아이의 '착함'을 약점 삼아 가차 없이 자신의 만족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 "네가 이해해라", "너마저 그러면 안 된다"라는 말들은 아이의 영혼을 갉아먹는 그루밍이자 가스라이팅이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타인의 기분을 먼저 살필 때, 어른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이를 '성숙함'이라 치켜세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것은 성장이 아니라, 타인의 만족을 위해 내 자아를 유기하는 과정일 뿐이다.
2. 공동체라는 이름의 거대한 통제실
이러한 착한 아이 프레임은 가정 담장을 넘어 슬롯 곳곳으로 확장된다. 온라인 게임, 친척 모임, 작은 동호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슬롯는 개인이 오롯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에게, 다음 중 한 마디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이쯤 되면 결혼해야지."
"취직은 번듯한 곳으로 해야 부모님 면이 서지."
"아이 하나는 외로우니 둘은 낳아야지."
"딸만 둘이니 아들 하나 더 있어야지."
차라리 한 번만 들었던 거라면 좋을 말들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통제의 말들은 '조언'이라는 탈을 쓴 규제다. 공동체의 질서와 표준화된 행복의 기준을 강요하며 개인의 선택권을 박탈한다.
3. 저출생과 비혼은 통제 문화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
어쩌면 오늘날의 낮은 혼인율과 출산율은 이러한 숨 막히는 통제 문화에 대한 개개인의 처절한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착한 아이'로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느라 이미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 세대에게, 또다시 누군가의 부모나 배우자로서 '완벽한 역할'을 수행하라는 압박은 거대한 공포로 다가온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슬롯에서, 새로운 생명을 데려와 똑같은 통제의 굴레를 씌우고 싶지 않은 무의식적 저항인 셈이다.
4. 인증의 조건 : 나쁜 어른이 될 권리
진짜 성인으로 인증받기 위한 세 번째 단계는 '기꺼이 나쁜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쁘다'는 것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나를 착취하고 규정하려는 집단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격리하는 결단이다.
주민등록증은 만 19세가 되면 국가가 발급해 주지만, '내 삶의 주도권'이라는 성인 인증서는 타인의 실망을 견뎌낼 때 비로소 내가 나에게 발급할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누군가에게 기꺼이 실망감을 안겨줄 용기가 있는가? 그의 실망과 통제되지 않은 불안감을 전가받기를 거부할 힘이 다져졌는가?
그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슬롯적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진짜 성인의 문턱에 서게 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우리의 힘은, 지난 착한 아이의 어린 시절 속에서 이미 쌓인 삶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것과 그 내공을 이제 자신을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권력자를 실망시켰을 때, 혹은 슬롯적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 느끼는 그 불쾌한 수치심은 누구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