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낳아준 이가 나의 성장을 돕는 구원자일까?
나를 낳아준 이가 나의 성장을 방해할 때
우리는 타인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졌다.
'탄생'이라는 사건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며, 그 대가로 부모라는 거대한 세계를 첫 보호막으로 부여받는다.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에 새겨진 생년월일은 내가 이 땅에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첫 번째 성인인증의 예고편이다.
그러나 묻고 싶다. 나를 물리적으로 탄생시킨 이들이, 정작 나의 정신적 탄생과 성숙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면 그 탄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진정한 성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탄생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억압하는 '가족'이라는 탯줄을 스스로 끊어내고, 오로지 나의 의지로 '두 번째 탄생'을 감행하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천륜'이라는 단어에 묶여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미성숙을 견뎌낸다. 10여 년 전의 나도 그랬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인 신혼의 단꿈을 꾸어야 할 시기에 나를 찾아온 것은 축복이 아닌 부모의 주취 폭언이었다. 그때 슬롯와 가족 시스템이 내게 강요한 논리는 비겁했다. "부모 이기는 자식 없다"는 말로 피해자인 나를 가해자 앞에 무릎 꿇리고 사과하게 만들었다.
당시 내가 취했던 사과의 제스처는 진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탄생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내 영혼을 갈취하려는 이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처절한 '생존형 연기'였다. 억지로 연기를 하는 내 모습이 가여웠고, 기시감이 느껴졌던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나를 낳아준 이들이 나의 성숙을 축복할 자격이 없다면, 나는 그들이 부여한 '자식'이라는 이름표를 스스로 떼어내야만 비로소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슬롯가 숫자 몇 개로 성인인증을 갈음하듯, 부모들은 '낳아주었다'는 사실 하나로 자녀의 인생에 무단 침입한다.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자녀를 영원히 미성숙한 존재로 박제하려는 시도들. 이것은 탄생의 숭고함을 모독하는 일이며,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수납하려는 폭력에 불과했다.
이제 우리는 주민등록증이 증명하는 물리적 탄생을 넘어, '정서적 성인인증'을 시작해야 한다. 가해자의 안타까운 사정이 전해지는 순간에 흔들리지 않고, 그들이 휘두르는 가스라이팅의 칼날을 거절이라는 차가운 방패로 막아내는 것. 그것은 불효가 아니라, 비로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탄생'했음을 선포하는 엄숙한 의식이다.
우리의 탄생이 주민등록번호라는 여덟 자리 숫자로 기록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박제된 생명에 불과하다. 진정한 탄생의 의미는 그 숫자 뒤에 내가 나를 채워갈 '숫자 아닌 언어들'을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타인이 나를 '철없는 자식'이나 '부양의 도구'라는 빈약한 단어로 정의하려 들 때, 나는 나를 지키는 단호한 거절의 언어와, 상처 입은 내면의 아이를 보듬는 치유의 언어를 스스로 써 내려가야 한다. 규격화된 서류상의 숫자들은 결코 내가 겪은 고통의 깊이나, 그 지옥 같은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 발휘했던 용기의 무게를 증명해주지 못한다.
성인인증이란 결국, 타인이 부여한 숫자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와 나만의 서사와 가치관이 담긴 문장들로 내 삶을 다시 서술하는 과정이다. 내가 선택한 언어들이 내 삶의 빈칸을 채우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의 자녀가 아닌 '온전한 한 명의 성인'으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탄생의 진정한 의미는 나를 낳아준 부모의 인정에 있지 않다. 나를 파괴하는 관계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격리하고,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겪었던 미성숙의 대물림을 끊어주겠다는 결단 속에 있다.
당신이 만약 지금 부모라는 이름의 거대한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기꺼이 그 '불효 자식'이 되어라. 이건 그들의 틀 안에서 부모를 이기는 자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세계를 '졸업'하는 성인이 되는 뿌듯함을 찾는 것이다. 스스로를 다시 낳기로 결심한 그 순간, 당신은 비로소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짜 '성인인증'의 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건, 그렇게 나를 아프게 했던 부모님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했던 스스로가 가진 내면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