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양연화 >
같은 날 옆방으로 이사 온 두 부부가 있다. 차우(양조위)와 그의 아내, 리첸(장만옥)과 그녀의 남편. 복도는 비좁고, 사람은 많고, 복작복작 뒤섞여 살아가야 하는 그런 건물이다. 차우와 리첸의 배우자들은 출장과 야근이라는 핑계로 점점 집에서 자리를 비운다.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가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외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서로의 배우자를 연기해 보기 시작한다. 차우는 리첸의 남편을 연기하고, 리첸은 차우의 아내를 연기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 연기 안에서도 사랑의 감정이 자란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자신의 배우자들과는 엄밀히 다르다는)을 지켜내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사랑은 분명한 형체를 갖게 된다. 차우는 싱가포르로 떠나버린다. 그들은 한 번씩 서로를 찾아가지만, 끝내 마주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내밀한 욕동, 불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는 언어를 잃게 된다. 언어의 이면에는 슬롯 안에서 내가 지켜야 할 약속, 역할, 관계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이를 지켜냄과 동시에 더 깊이 자리한 욕동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존재적으로 매 순간을 연기하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기'에서 우리는 위선이나 가면 따위의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를 거두어야 한다. 그보단 필연적 존재 양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그 순간 연기는 시작된다.
차우와 리첸은 서로의 배우자를 이해하기 위해 연기를 해보자고 말한다. 서로의 남편과 아내가 했을 법한 말투를, 외도가 성사되기 위해서 있었음직한 행동을 연기해 본다. 이해해 보기 위한 연기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사랑이 결국 어떤 종류의 종국에는 다다를 것이라 예감하게 된다.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 본다는 것, 그리고 끝내 그들의 배우자를 이해해 본다는 것, 사랑에 빠지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건 연기일 뿐이라며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들과 다르다는 걸 증명해내려 하지만 언어를 통해 감지하고 있는 사랑을 부정할 수 없다. 하여 결국 그 사랑이 온전한 형태를 갖추기 직전 차우는 떠나버리고 만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함께하는 영원을 꿈꾸게 된다는 것이다. 변치 않는 마음을 약속하고 그것을 결백하게 수행하는 것이 서로의 바카라임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약속을 받아내려 하지만, 그것을 어찌 쉽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연기이고, 그 연기는 필연적으로 찰나일 수밖에 없다. 당신을 향해 내보이는 어제의 미소와 오늘의 미소는 모양도 내용도 미묘한 뉘앙스도 다르다. 우리가 영원이라 부르는 것은 이 찰나에 머무르는 연기를 긴 호흡의 서사로 꿰매어 만들어낸 것이다. 조금씩 다르게 매번 반복되는 찰나, 그리고 그 위에 영원이라는 착시가 얹힌다.
영화는 이를 담담하게 폭로한다. 영원은 인간 스스로 적극적인 수행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사랑의 찰나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해 발생하는 부산물이요, 의지적 결단보단 불가피한 미끄러짐에 가깝다. 애석하게도 그 순간순간의 찰나에 온전히 몰두할 수 없었던 인간의 마음속에는, 그 시간들이 사후적으로 결박되어 버린다. 다시 돌아간 아파트는 냉정하게도 그때의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다. 차우의 마음속에 결박되어 버린 찰나의 프레임으로 바라본 아파트에는, 리첸이 존재한다.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리창처럼 건너를 볼 순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이러한 인간의 존재 조건 중 어느 것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영화는 끝자락에 이르러 한 줄의 문장을 자막으로 띄운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그곳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그 시간이 어렴풋이 비치기는 하지만, 손은 그곳에 닿을 수 없다고. 이것은 차우와 리첸의 이야기이면서,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면서도 동시에 그 시간으로부터 한 발짝 늦게 그 삶에 도착한다. 매 순간의 찰나는 그 자체로 이미 유리창 너머에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닿을 수 없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