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by최환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늘 결핍을 느끼게 만드는 단어가 바로 ‘믿음’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과 깊은 유대감을 맺고 안정감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 일에 늘 서툴고 두려워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천륜으로 맺어졌다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조차 믿음의 결핍으로 인한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서로를 가장 사랑해야 할 관계에서조차 왜 이토록 믿음은 쉽게 흔들리는 걸까? 어떻게 해야 타인을, 더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믿을 수 있을까?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상대를 의심하게 만드는 원인은 일상의 사소한 틈새에 숨어 있다. 거창한 배신이나 사기가 아니더라도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쌓이면서 믿음은 서서히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첫째,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다. 누군가를 믿지 못할 때 그 원인이 100% 상대에게만 있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경우 내 안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와 두려움이 상대에게 투영된다. 과거에 누군가에게 깊은 실망을 느꼈거나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벽을 세운다. ‘저 사람도 결국 나를 실망시키겠지’, ‘나중에 상처받지 않으려면 미리 거리를 두는 게 좋아’라는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가 발동하는 것이다. 결국, 상대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두려움이라는 왜곡된 렌즈를 통해 바라보기에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둘째, 기대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 때문이다. 종종 ‘믿음’과 ‘기대’를 착각한다. 상대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모 자녀 관계에서 이런 현상이 도드라진다. 부모는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바른길로 갈 것이라 ‘믿는다’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대개 부모가 정해놓은 가이드라인에 자녀가 맞춰주기를 바라는 강한 ‘기대’에 가깝다. 자녀가 부모의 기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부모는 “나는 너를 믿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니?”라며 실망하고, 자녀는 자녀대로 ‘부모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라며 마음의 문을 닫는다.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는 욕심이 깊어질수록 진짜 믿음은 멀어진다.


셋째,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내가 말 안 해도 알겠지’라는 생각은 인간관계를 망치는 가장 흔한 주범이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의 틀이 다르다.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가 느끼고 해석하는 방식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오해가 생겼을 때 솔직하게 대화하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되면 그 빈자리는 부정적인 추측과 억측으로 채워진다. 특히 부모 자녀 사이에는 세대 차이라는 거대한 벽이 존재한다. 잔소리나 간섭과 같은 부모 세대의 사랑 표현 방식이 자녀 세대에게는 통제나 구속으로 인식될 때 대화를 통해 이를 풀지 않으면 서로에 대한 불신만 깊어지게 된다.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인 부모 자녀 관계에서 믿음이 부족해지는 현상은 우리에게 더 큰 씁쓸함을 남긴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전부가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관계는 묘한 긴장감에 휩싸이곤 한다.


부모는 자녀를 자신보다 미숙한 존재로 여기기 쉽다.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며, 자녀의 선택과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개입하려 한다. 이런 불신은 자녀의 자립심을 꺾고 부모에 대한 반발심을 키운다. 반대로 자녀는 부모가 늘 완벽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길 기대하지만, 부모 역시 불완전한 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깊은 실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삶이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조그만 틈새로도 더 큰 상처가 파고든다. ‘가족이니까 당연히 이해해 주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서로에 대한 존중을 무너뜨리고, 결과적으로 가장 굳건해야 할 가정 안에서의 신뢰를 약화하는 원인이 된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믿을 수 있을까?


상대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눈을 감고 낙하하는 위험한 도박이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태도를 바꾸고, 상대와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며, 꾸준한 노력을 통해 쌓아 올리는 성숙한 선택이다.


첫째, 내 안의 두려움을 먼저 성찰해야 한다. 누군가를 믿기 위한 첫걸음은 내 마음을 먼저 살피는 것이다. 내가 왜 저 사람의 말과 행동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는지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내 불안의 원인이 상대의 잘못된 행동 때문인지 아니면 상처받기 싫어하는 내 조바심 때문인지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내 안의 두려움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향해 뾰족하게 돋아나던 날카로운 시선을 한풀 꺾을 수 있다.


둘째, 상대를 나와 다른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해야 한다. 진정한 믿음은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여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와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해 줄 수 있을 때 완성된다. 특히 자녀나 배우자처럼 가까운 관계일수록 소유욕을 내려놓아야 한다. 상대를 내 기준에 짜 맞춰 평가하려 하지 말고 그 사람 자체의 고유한 성향과 속도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내 생각과 다르지만, 너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열린 마음이 믿음의 토양이 된다.


셋째, 투명하고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 짐작과 오해로 얼룩진 마음을 씻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투명한 대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를 비난하는 어조가 아니라 내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대화 방법이다.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니까 못 믿겠어”가 아니라 “당신의 그런 행동을 보니 내가 조금 불안해지는데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자세히 듣고 싶어”라고 다가가는 것이다. 부모 자녀 사이에서도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걱정이 되어서 그러니 네 생각을 자세히 말해줄래?”라며 아이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다. 부모의 이런 태도가 신뢰를 다시 싹트게 만든다.


넷째,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한 번 무너지거나 처음부터 쌓기 힘든 신뢰를 단번에 회복할 방법은 없다. 믿음은 일상의 아주 작은 약속들을 지켜나가는 과정에서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드는 것이다. 거창한 약속 대신 ‘몇 시까지 연락하기’, ‘약속 시간에 늦을 때 미리 연락해 주기’와 같은 사소한 것부터 서로 지켜나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러한 작은 성공 경험들이 켜켜이 쌓일 때 비로소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믿음의 뼈대가 완성된다.


믿음은 상대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자 나를 구원하는 길


인간관계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상처받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그렇기에 두렵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아무도 믿지 않고 마음의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린다면 평생 외로움과 고립이라는 더 큰 감옥에 갇히게 된다.


상대를 믿어준다는 것은 상대에게 ‘나는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최고의 가치를 선물하는 일임과 동시에 내 삶을 의심과 불안으로부터 해방하는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망을 겪을지라도 다시 마음의 문을 열고 한 걸음 다가가는 용기를 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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