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문동 봉주르 아파트 1부: 아파트 재건축 전
“회장님, 나요. 안일해.”
“네, 안 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인자 동대표도 아닌디 뭔 대표요. 허허.”
“왜요, 에어컨 업체 대표님 맞으시잖아요.”
“하하, 허긴 그것도 그라요. 지가 전화드린 이유는요. 사실 지는 이 아파트랑 밀양에 솔찬히 정이 많이 들어부렀소. 나가 먹고 살아보것다고 전라도서 경상도까지 넘어오믄서 월매나 걱정을 많이 했간디요. 지금이야 덜 허지만 옛날엔 전라도 차는 경상도서 기름도 안 넣어준다는 말도 있었지라. 근디 그런 나를 아무 편견 없이 받아준 것이 이 아파트 주민들이요. 솔직히 여그 사람들 아니었으믄, 이 아파트 아니었으믄 나도 먹고살기 허벌나게 힘들었지라. 일이 어떻게 이렇게 꼬여부렀지만 이 아파트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아요. 뭐 지금은 이사 가고 이사 오고 함서 사람도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려도 난 믿어요. 우리 아파트는 분명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 그라고 우리 아파트처럼 하늘이 내려분 환경을 가진 아파트가 어디있소? 지는요, 아무리 화나고 속
상한 일 있어도 우리 아파트 송림 따라 밀양강 잔도길까지 걸어불고 나면 세상 근심 싹 사라져부러요. 가끔은 여그가 아파트인지 전원주택인지 헷갈려부러요! 하하!”
“안 대표님 말씀 맞습니다. 삼문동도 그렇고 우리 아파트도 그렇고 동네가 이렇게 살기 좋다는 건 그만큼 좋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거겠죠. 그래서 이제 그 좋은 분들과 함께 더 좋은 아파트 만들어보려고요.”
“그래서 말인디, 나가 죄바카라감도 좀 있고 여그를 원채 사랑한께 인자 진짜 제대로 봉사해불라고요. 동대표는 아니지만 입주민으로서!”
그동안 아파트에 해를 끼친 것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기술을 아파트 일에 쓰겠다는 진심에 입대의는 안일해를 기술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안일해는 지하창고도 깔끔하게 비우고 새 창고로 이전하며 입주민들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배 소장은 다른 아파트에도 소문이 쫙 퍼져 소장직도 구해지지 않아 이제 양봉에 전념하며 노후를 보내겠다고 밀양 인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회장이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던 아파트의 묵은 문제를 단 3개월 만에 해결했다는 소식이 퍼지며 봉주르 아파트와 인근 아파트까지 떠들썩했다. 하지만 정한은 마냥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보궐선거로 빠진 동대표 자리를 메워야 했고, 소장도 새로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보궐선거가 더 걱정인 이유는 이번에 이런 초대형 푸닥거리를 모든 입주민이 목도했기 때문에 동대표 자리를 더욱 기피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역시 넌 죽지 않았어. 대단해. 이번에도 깔끔하고 신속하게 정리했군!”
정해는 이번에도 축하 파티를 열어야 한다며 집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열어 공정한 회장님의 성과를 치하했다.
“정리는 했지만 이제 할 게 더 많아. 동대표 보궐선거가 가장 걱정이고. 누가 이런 자리를 하려고 하겠어?”
그러자 정해, 정한, 지훈의 눈길이 동시에 정해의 남편에게 꽂혔다.
“뭐? 나? 절대 안 해. 그리고 나 같은 회사원이 동대표를 어떻게 해? 보니까 평일 낮에도 신경 써야 할 게 엄청 많던데. 처남, 섭섭해하지 마. 진짜 내가 회사원만 아니었으면, 당장 동대표 나가서 우리 처남 보좌하지!”
“괜찮아요, 매형. 회사원은 진짜 동대표 하기 힘들죠. 그래서 아파트 동대표나 회장들 보면 다 퇴직 이후 하시는 분들이라 고령화돼 있거든요.”
“나도 하고 싶은데…….”
“하하하, 지훈이 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돼. 네가 그때 동대표 나오면 최연소 동대표겠는걸? 아니면 그때 내친김에 회장까지 해봐!”
정한은 지훈이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그래도 내 주변 엄마들이 이번에 회장 제대로 뽑은 거 같아 다행이라고 난리야. 그 1동 아저씨 지하주차장 개인 창고처럼 쓴 거 해결한 거도 그렇고 특히 관리소장! 엄마들 얘기가 관리소장 내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더라고. 근데 그걸 내 동생, 공정한이 단시간에 깔끔하게 해결했다는 거 아냐! 여보, 이거 보여? 내 어깨에 힘 들어간 거.”
“얼씨구, 어깨 뽕이 남산만큼 솟아올랐네! 이러다 처남, 정치하는 거 아냐? 우리 회사 사람들한테 처남 얘기했더니 정치할 거 같다던데. 근데 거 정치는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내가 접때 얘기한 거 있지? 우리 회사에…….”
“스탑, 당신 취했네. 잡소리할 거면 그만 마시고 가서 좋아하는 게임이나 해.”
“잡소리, 맞아. 나 지금 처남 Job 소리 하려고 하잖아. 있지, 처남. 우리 회사 나쁘지 않아. 경남권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중견 기업이야. 그리고 처남 머리가 너무 아깝잖아. 인사팀장이랑 대표님은 처남 얘기 듣자마자 꼭 한 번 만나자고…….”
“아오……. 내가 하지 말랬지? 한국대학교에 일성전자 임원까지 했던 애를 어디 지방에 코딱지만 한 회사에 갖다 붙이려고?”
“어허……. 우리 회사 안 작다니까! 암튼 처남, 하늘은 우릴 향해 열려 있어, 회사는 처남 향해 열려 있어. 알겠지? 언제든지 말만 해.”
매형은 듀스의 <여름 안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정한에게 맥주를 따라주었다.
매형은 정한을 볼 때마다 자기 회사에 들어오라며 러브콜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정해는 기겁하며 남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광경이 종종 반복됐지만, 정작 정한은 항상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럴 때면 되려 그에게는 예전 회사 생활의 모습들이 주마등이 되어 더욱 선명하게 펼쳐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채워지는 맥주를 보자, 고된 프로젝트를 마치고 술 한 잔씩 기울이던 그때가 떠올랐다.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던 그때. 대부분의 회사원이 회사는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거라 하지만, 그에게 있어 회사는 다니고 싶어 다니는 곳이었다. 개인의 목표와 회사의 목표가 일치할 수 있는 실낱같이 희박한 확률을 거머쥐고 있었던 그였기에 회사 생활이 고될 리가 없었다. 다만 부수지 못하는 벽을 부수려면 내가 먼저 으스러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정한의 일성전자 감사팀장 시절.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지금 이걸 감사 계획이라고 올려! 너 인마, 내가 너 이딴 거 하라고 임원 달아준 줄 알아? 이 새끼가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이제 노브레이크네 아주?”
“전무님, 이건 심각한 사안입니다. 반드시 제대로 감사하고 여기서 멈추도록 해야 합니다!”
“누가 심각한 거 몰라, 인마? 그리고 누군 몰라서 지금까지 감사 안 했냐! 아무리 심각해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너야말로 상대가 누군지 몰라서 이러냐!”
미래전략본부장인 곽 전무는 정한이 상신한 서류를 테이블에 내리꽂으며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공정한이…… 너 인마, 여기서 회사 생활 종 칠 거야? 너 그 잘난 공명심 발휘하다가 인생 종 칠 거냐고?”
“전무님, 제가 언제 공명심 발휘한다고 했습니까? 저는 그저 제 일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하! 그래, 일 좋지. 누군 일할 줄 몰라서 그래, 어? 아무리 일을 하더라도 오너 2세는 아니지! 네가 지금 감사하겠다는 게 로열패밀리 중 다음 오너로 가장 유력한 노 상무니까 내가 지금 이러는 거 아냐!”
“감사에 성역이 어디 있습니까? 전무님, 이거 이대로 모른 척 하고 두면 나중에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 막게 됩니다. 분식회계라고요! 자칫 언론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회사 이미지 추락하고 주가도 폭락, 아니 상장폐지까지 될 겁니다!”
“하…….”
곽 전무는 공기청정기를 틀더니, 전자담배를 꺼내 물며 한숨을 돌렸다.
“공정한이. 이거 분식회계 아니야. 그리고 막말로 그렇다고 쳐. 이걸 왜 감사팀이 끄집어내? 나중에 경찰이나 검찰이 하겠지! 그리고 우리 회사 오너면 이 정도 일은 충분히 무마시킬 힘이 있어. 네가 감사를 해서 긁어놔봐야 부스럼밖에 안 된다 이 말이야. 너 인마, 최연소 감사실장 너 혼자 된 거 같아? 다 노 상무가 만들어 준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자기 어리다고 무시하고 반기 드는 팀장들, 임원들 털어내면서 오너까지 가려면 너 같은 젊은 칼이 필요하다고. 그런 사람한테 이빨 드러내면 되겠냐? 키워준 사람은 물면 안 되지.”
“전무님, 제 이빨 감추라고 키워주신 거면 전 차라리 제 이빨 뽑겠습니다.”
“정한아, 말 좀 들어라. 너 노 상무 건드리면 지방 발령으로 안 끝나.”
“어차피 감사팀만 있어서 제 동기들도 저랑은 밥도 안 먹습니다. 다른 팀이든 지방이든 감사팀 출신은 받아주는 데도 없다는 거 전무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뭐? 옷이라도 벗게? 이 자식이 진짜……. 너 지금 딸린 처자식 없다고 사직이 쉽냐? 로열패밀리 털고 회사 나가게? 네가 무슨 논개야? 아니지. 논개는 같이 빠져 뒈지기라도 했지. 넌 인마 혼자 빠져 뒈지는 거야. 계란으로 바위를 꼭 쳐봐야 깨질지 안 깨질지 아냐? 어쨌든 난 이 감사 계획 반려야. 너 행여 허튼 생각 하지 마. 알았어? 인마, 이건 네가 대학 때 학생회장 날린 거랑은 차원이 다른 거야. 원칙도 비벼볼 만한 사람끼리나 지키는 거야. 아랫것이 왕한테 지키려는 원칙은 아랫것이 부리는 발칙으로 보일 뿐이라고.”
곽 전무의 만류는 정한의 신념까지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감사에 대한 결재가 떨어지지 않자, 정한은 결국 내부고발과 단독 감사를 단행하였고, 그 결과는 역시 참혹했다. 검찰이 들이닥쳐 노 상무의 방을 압수수색까지 단행됐지만, 그것은 다 보여주기식 쇼에 불과했고, 3년간의 재판이 진행되며 정한은 배신자의 낙인을 안고 회사 생활을 힘겹게 이어가야 했다. 그럼에도 정한은 반드시 유죄가 확정되어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원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지켜져야 함을 증명하고 싶었으나 긴 재판의 결론은 무죄였다. 무죄가 확정되자, 일성전자의 광고로 먹고사는 언론 역시 정한의 무모한 내부고발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의 오너는 자기 아들을 3년간 검찰과 법원을 들락거리게 한 대가로 모두에게 보란 듯이 정한의 감사를 진행했고, 오만 가지 사유를 달아 그를 실장에서 과장으로 강등시켰다. 그런 수모에도 꿋꿋이 출근하는 정한이 괘씸했는지 노 상무는 서울에서 가장 먼 남미 공장으로 정한을 발령을 내버리며 정한의 회사 생활도 결국 마침표를 찍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것. 그것은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을 겪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길에서 무엇을 마주하더라도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흔하디흔한 우리는 이 뻔하디뻔한 결과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남들이 남겨둔 발자국만 따라다닌다.
“꼴 좋다. 어린놈이 너무 설친다 했어.”
“그러게. 저번에 법인카드 사용한 거 가지고 어찌나 사람을 잡던지……. 어휴!”
“야, 나는 저 자식 대리일 때 과장이었는데도 감사실에 불려갔더니 저 자식이 상사 같더라니까?”
“그리고 막말로 지 능력으로 임원 됐어?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까불었으니, 쯧쯧!”
그 누구도 정한을 위로하거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원칙을 지키며 사는 것은 어쩌면 나를 버리고 사는 것과 같았다. 내가 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 되는 이 불합리한 현실. 그래서 사람들은 편함을 유지하기 위해 불합리와 합의한다.
봉주르 아파트는 이제 새로운 동대표를 뽑는 보궐선거와 새 소장의 채용을 한꺼번에 진행해야 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도 내보내지 못한 능구렁이 소장도 나가고 그와 결탁한 동대표들도 사임했으니 새해답게 아파트도 새롭게 태어날 거라는 기대감을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한은 그 어떤 기대도 기쁨도 없었다. 해는 바뀌어왔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계절은 변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기에, 아파트 광장에서 홀로 반짝이며 어둠을 밝히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며 마치 자신이 광장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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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삼문동 봉주르 아파트>가 국립중앙도서관 10월의 바카라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추천 이달의 바카라은 2개월에 한번 4개 분야에서 각 2권을 선정, 총 8권이 뽑히게 되는데 10월 문학분야에 <삼문동 봉주르 아파트>가 선정되었습니다. 세상에 좋은 바카라이 너무나 많은데 제 바카라을 어떻게 알고 선정해 주셨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삼문동 봉주르 아파트> 연재는 여기에서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재미있게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어지는 내용인 2부 아파트 재건축 후는 2025년 12월 출간된 단행본을 통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재미있게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끊이지 않는 아파트 문제가 해결되어 더 살기 좋은 아파트가 많아지길 바라며
2026년 오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