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그리고 사랑

by레마누

오랜만에 동생 전화를 받았다. 사촌동생의 결혼식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가던 중에 제부가 다쳤다는 말이 나왔다. 얼마 전에 화장실 조명을 갈다 갈비뼈가 부러져서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어깨힘줄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플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동생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다친 경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동생은 중학교선배와 결혼했다. 시내 나와 산 지 오래됐지만, 제부는 여전히 동네일에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면체육대회가 열린다. 각 동네마다 사활을 걸고 체육대회를 준비한다. 축구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 소환되고, 배구와 이어달리기를 위해 비행기 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선수단이 꾸려지면 연습은 또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한때 농구선수였던 동생 말로는 안 나오면 집에 찾아와서 데려간다고 했다. 운동을 못 하는 나는 아무도 찾지 않았지만, 동생들은 해마다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눈치다.


제부가 달리기와 축구 대표선수다. 제부 표현에 의하면 한때 날아다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축구경기가 있으면 제부에게 연락이 온다. 아무리 그래도 마흔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발이 느려지고,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데, 여전히 제부는 날아다녔던 시절만 기억한다며 동생의 불만 어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런 제부의 성정이 일을 벌였다. 제부네 동네가 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반전 휘슬이 울리자 제부가 교체되어 들어갔는데, 들어가는 순간 상대의 과격한 태클에 넘어져 다친 것이다. 대표선수도 아니고 태클에 힘줄이 끊어지는 게 말이 되냐고 했더니, 여기 사람들은 다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언니, 여기서는 다 목숨 걸고 경기해. 이번에는 김서방이 운이 없어서 다친 거지만,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사람들은 넘어지고 다쳤어. 기브스하고 저녁까지 술 마시고, 그렇게 살아.

-정말? 난 그것도 모르고. 제부가 나이 생각 안 하고 몸 사릴 줄도 모르고 그러는 줄 알았더니만, 아닌 거야?

-응, 아니. 여긴 다 그래. 중학교 남자아이들처럼 축구에 목숨을 걸어. 진심으로 경기를 뛰고, 진심으로 응원해. 뭐든 진심이야. 최선을 다해. 그리고 다음 날 잊어버리고 사는 거지.


다쳤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걱정이 앞섰는데, 얘기를 듣다 보니 이해가 됐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전날부터 잠을 설쳤다. 달리기를 못 해도 목소리가 커서 응원단장을 했다. 우리 팀이 이겨라 목 놓아 응원했다. 상대의 반칙에 핏줄을 세우고, 억울한 판정에 달려가 항의했다. 쉽게 흥분하고 크게 웃고, 심하게 토라졌다가 금세 낄낄거렸다. 이기면 세상을 얻은 것처럼 좋았고, 지면 속상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운동회날만큼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괜찮았다. 나는 가슴속에 있는 것들을 다 뽑아내고 싶었다. 펄럭이는 만국기들처럼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촌의 아이들의 성질을 아직도 잘 모른다. 시내에서 산 지 30년이 넘었지만, 그렇다고 제주시 사람이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늘 바깥에서 맴도는 느낌이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자. 아무도 내치지 않았지만, 섞이지 못한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고 싶은 사람들은 촌에 사는 사람들이다.


단순하고 순진하고 땅의 힘을 믿고 사는 사람들.

여전히 사람 사는 냄새가 폴폴 나는

그래서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보다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사람들..

웃고 우는 것에 가식이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있어 내가 있다.


제부는 결국 사촌동생의 결혼식장에 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제부 덕분에 다시 글을 쓸 용기가 생겼다. 끊어진 제부의 힘줄 덕분이다. 면체육대회와 축구경기, 제부와 후반전, 힘줄과 사촌동생의 결혼식이 점이 되고, 그 점들을 이어 글을 만든다. 나는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도 응원하는 사람도 아닌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쓰는 사람이다. 사람 그리고 사랑을 생각하고 연결해서 글로 뽑아내는 사람이다. 그게 나란 사람이다.

이전 19화꿈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