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타인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내 몸 하나 겨우 지키려 했던 배타적인 성격, 그리고 많은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마음은 사실 관계의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달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영아 시절 치렀던 고열의 후유증으로 뇌전증을 얻게 되었다. 이후 나는 내성적인 성격도, 남들보다 더디었던 학업 능력도 모두 이 병의 탓으로 돌렸다. 세상 전체가 나를 억지로 깎아내리는 듯한 억울함 속에서 살았다.
슬롯라는 벽을 실감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철저한 소수자라 느끼며 살아가던 중, 군 면제를 받고 알바 면접을 볼 때마다 "왜 면제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분단의 아픔이 서린 이 나라에서 이 병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몸이 조금 아파 면제받았다"라며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나는 내 가능성보다 내 몸에 난 가시에 집중했다. 오랫동안 남겨진 흉터 때문에 내가 여전히 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믿었다.
이것을 단념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비로소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 해야 할지 단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코로나의 끝자락,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불안감에 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당장 돈을 버는 대신 무엇이든 도전해 보기로 했다. 사람이 살아갈 때 삶에 무언가 흔적을 남겨야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억눌러 온 모순은 결국 내 가시를 스스로 어떻게 재정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깊게 자리 잡은 트라우마와 육체적인 약점이라는 그림자는 단순한 말 한마디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 더 큰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다. 성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시간만 흘러간다고 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해마다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성취해 나가는 과정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나에게 가장 깊은 안정감을 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지난해 나는 부크크를 통해 7편의 공저를 써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했지만, 감추고 싶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글이 피상적으로 흘러갈 때마다 "아픈 글을 써내는 것이 작가의 운명인가"를 깊이 고민하며 갈등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직면하고 글로 기록해 내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 상처를 타자화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글쓰기는 나에게 치유이자 극복의 과정이었다.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55장 5절)”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나를 부르는 새로운 희망의 소리는 우울에 빠져 있던 나를 다시 한 걸음 걷게 만드는 단단한 힘이 되었다. 이 구절을 마음에 품으며 나는 '나는 나다'라는 당당한 선언을 내 삶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타인의 시선과 끊임없는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층 더 성숙하고 당당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완성해 낸 것이다.
수많은 비교가 판치는 세상 속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인문학적 성찰과, 어떤 악함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선함의 가치였다. 비록 내가 세상의 기준에서 소수에 속할지라도, 나만의 결을 따라 삶을 개척해 온 이 길을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 삶을 스스로 준수하게 다듬어 낸 지금, 과거의 흠결은 이제 내 인생 전체에서 아주 작은 흔적일 뿐이다. 나는 내 가시를 넘어, 나만의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