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미술관 '희원' 나들이
주말 중 하루는 나들이나 문화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 운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주로 운전을 한다. 이렇게 편하게 가도 장거리는 몸에 부담이 되어서 크게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근교로 목적지를 선택한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를 보았고 거기서 우리나라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가보았던 곳들 중 호암 미술관의 정원 희원과 선유도 공원과 아산 병원 정원 등이 그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르고 보았을 때도 좋았지만 영화를 통해 그 사람의 작품 세계와 철학에 대해 알게 되니 다시 한번 그 장소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매년 봄이면 우리나라 전역에 벚꽃이 만발하고 우리 동네의 벚꽃도 장관이어서 그때는 충분히 밖에서 꽃을 감상한다. 벚꽃의 특성이 화려하기도 하고 꽃이 피는 기간이 짧아서 아름다움이 한때라는 교훈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똑같은 꽃이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면 섬뜩할 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전체의 일부가 되며 개성이 사라지는 착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비슷한 경험을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한 적이 있다. 거대한 라벤더 농장을 방문했는데 넓은 지역에 끝없는 라벤더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의 바다에 감탄했지만, 유럽 영화에서 보듯 넓은 초록색 초원에 라벤더가 섞여서 펼쳐져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나중에는 다른 꽃이나 풀은 허락하지 않는 인공적으로 강제한 한 가지 색의 향연이 불편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나라의 지자체가 개최하는 한 가지 꽃을 주제로 한 꽃축제도 노력은 가상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도 특이하고 예쁘지만 왕이 높은 궁전에서 내려다볼 때 평면적으로 아름다운 모양이 되도록 조형적으로 다듬은 매우 인공적인 모습이다. 실제로 땅을 밟고 그곳을 산바카라하는 사람이 전체를 즐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하얀 모래와 바위를 정교하게 배치한 사찰의 정원을 보면서도 나름의 조형미는 있지만 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이 불편한 마음의 이유를 알려준 사람이 조경가 정영선이었다. 나는 조경에 문외한이어서 이 무의식적인 불편함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녀가 이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조경 철학은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이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백제 궁궐을 설명할 때 쓴 말이라고 하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그녀가 추구한 조경은 잘난 체하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곳 한복판이 아니라 정자에 앉아 한걸음 물러나서 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조경가를 창조자가 아니라 연결자로 본다. 따라서 원래의 지형과 기존의 건축과 바위와 나무와 꽃의 조화를 중시한다. 그녀는 기존의 환경을 싹 밀어버리고 새로운 정원을 구축하지 않는다. 선유도 공원의 경우 기존의 정수시설을 놔두고 거기에 정원을 만들면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높낮이가 다른 구조물과 기둥에 붙은 담쟁이덩굴이 마치 과거로 산바카라을 떠난 것 같은 신비한 느낌을 준다.
또한 유행을 타는 나무와 화려한 꽃으로 정원을 도배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만든 정원은 우리나라 산의 어디선가 본 듯한 나무들과 야생화들로 채워진다. 과거로부터 전해진 자연을 잘 가꾸어 후대에 물려주려는 마음이 느껴진다.
벚꽃이 질 무렵 다시 희원을 찾았다. 호암 미술관의 전시가 자주 바뀌고 계절마다 정원의 다른 경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번 가도 좋은 장소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에버랜드를 자주 가며 스치듯 구경했지만 이제는 희원이 주 목적지가 되었다. 근처 산에는 아직 지지 않은 벚꽃이 보이지만 정작 희원 안에는 벚꽃이 많지 않았다.
한옥에서 대문을 들어섰을 때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처럼 보화문을 통해 들어가는 정원도 미술관이 바로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매화나무숲과 고사리와 야생화가 피어있는 땅에 다양한 표정의 돌로 만든 벅수들이 우리를 반긴다. 작은 연못과 큰 연못 옆에는 정자를 짓고 정원은 건축이 어우러질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그녀는 창덕궁 후원을 샅샅이 뒤지며 관찰했다고 한다. 또한 낮은 담장을 설치해서 그 너머로 언뜻 보이는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정영선은 한국의 정원은 차경이 중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미술관 본관 앞에 연못과 잔디밭을 만들어 개방감을 주어서 멀리 보이는 산까지 정원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다양한 우리나라의 나무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고 다양한 우리의 꽃들도 만날 수 있다. 똑같은 종류가 한 계절에 확 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가지고 다른 시기에 피어난다. 정영선은 자연은 신이 만든 정원이라고 했는데 이때 자연은 다양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한국의 산의 지형과 다양한 수종과 꽃에서 정원의 원형을 보았다. 오히려 무엇을 일색으로 통일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 아닐까 싶다. 벅수뿐 아니라 불상과 탑과 바위까지 무엇 하나 주변 식생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다르면서도 조화로운 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바이다.
가을이 되면 또 여러 종류의 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계절에 가도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고, 설악산의 경우처럼 어느 계절의 정원이 가장 아름다운지 설전을 벌일 수도 있다.
벚꽃 시기처럼 사람이 몰릴 때를 피해 평일 오전 일찍 조용한 시간에 가서 희원 산바카라을 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 같다. 좀처럼 감정 표현을 하지않는 남편도 아주 좋았다고 한다.
시인이 글로 시를 쓴다면 조경가는 땅에 시를 쓴다. 우리는 그저 걸으며 예술가의 좋은 작품을 조용히 감상하면 된다.
*My Way작가님께서 제 바카라<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 의 리뷰를 쓰셨습니다. 너무 훌륭하게 쓰셔서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fishingproductfr.com/@bmt1023/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