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와의 공생미학
생태와의 공생미학 — 자연, 미생물, 지구와 함께 숨 쉬는 예술
김남효 교수 (동서양디자인연구소)
상상해 보세요.
숲 속에 마련된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바닥에서 자라는 버섯이 당신의 발걸음 진동을 느끼고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벽면에는 미생물이 살아 숨쉬는 생태계가 실시간으로 색을 바꾸고, 천장에서는 빗물과 바람, 먼 곳의 기후 데이터가 작품 속으로 스며든다.
작품은 더 이상 감상자를 기다리는 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당신의 호흡, 체온, 심지어 당신이 가져온 흙 한 줌까지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살아 있는 생태계가 된다.
이 순간, 자연을 ‘배경’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미생물·지구와 함께 호흡하고 함께 성장하는 공생의 관계 속으로 들어선다.
이것이 포스트휴먼 시대, 생태 미학(Eco Art & Bio Art)이 우리에게 건네는 부드러운 초대이다.
영국 철학자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현대 철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의 대표작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s)》에서 그는 기후 변화, 플라스틱 오염, 방사능, 석유, 그리고 심지어 코로나19 바이러스 같은 거대하고 모호한 존재들을 ‘초객체(hyperobjects)’라고 명명했다.
이 초객체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규모로 존재하며, 인간의 감각과 인지 능력으로는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초객체의 일부 증상—더워지는 지구, 미세플라스틱이 섞인 바다, 갑작스러운 이상기후—만을 경험할 뿐, 그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일상과 미래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 모턴의 관점에서 초객체는 ‘환경 문제’가 아니라, 인간 중심적 세계관 자체를 뒤흔드는 철학적 도전이다.
모턴은 이 개념을 바탕으로 말한다.
“모든 예술은 이제 생태적이다.”
이는 예술이 인간의 감정이나 슬롯적 이슈를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필연적으로 생태적 차원을 품어야 한다는 의미다. 오늘날 진정한 예술은 초객체의 ‘이상함(strange strangeness)’을 관객에게 느끼게 해야 한다. ‘이상함’이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끝없이 멀게 느껴지는 그 기묘한 감각을 가리킨다. 우리는 플라스틱 병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500년 후에도 지구를 떠돌아다닐 거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실감하지 못함’의 틈을 파고들어,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거대한 초객체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모턴에 따르면, 전통적인 자연 묘사 예술은 이제 한계를 드러낸다. 산과 강, 나무를 아름답게 ‘그리는’ 행위는 오히려 인간 중심의 시선을 강화할 뿐이다. 자연을 객체화하고, 관찰 대상으로 삼는 태도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대신 새로운 예술은 자연과 함께 ‘이상하게’ 존재하는 방식을 탐구해야 한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뒤집으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폐기물로 가득 찬 설치미술, 수백 년 동안 썩지 않을 핵폐기물의 시간을 다룬 사운드 아트, 또는 기후 변화로 사라져가는 풍경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들은 모턴이 말하는 생태적 예술의 전형이다. 이런 작품들은 ‘환경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미 초객체 속에 깊이 얽혀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체험하게 만든다.
결국 모턴의 철학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작품은 인간의 자아를 더 강화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넘어선 거대한 존재들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가?
기후 위기 시대에 예술은 더 이상 미적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상하게’ 함께 존재할 것인지를 탐구하는 철학적·정치적 실천이다.
Timothy Morton,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s), 사진출처: 아마존
덴마크-아이슬란드 출신의 세계적 설치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은 기후 위기 시대에 가장 주목받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 《Ice Watch》(2014~)는 기후 변화라는 ‘초객체’를 관객이 피부로 직접 느끼게 하는 강력한 생태적 예술의 사례다.
《Ice Watch》는 그린란드에서 채취한 거대한 빙하 덩어리들을 도시 중심부 광장으로 옮겨와 설치하는 작품이다. 런던, 코펜하겐,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선보인 이 설치작은 총 30여 개의 거대한 얼음 블록이 시계처럼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관객들은 이 얼음 덩어리들 사이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만지고, 기대고, 그 차가운 표면을 느끼고, 서서히 녹아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도록 초대받는다.
티모시 모턴이 말한 ‘초객체’의 핵심은 그것이 너무 거대하고 분산되어 있어 인간의 감각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후 변화는 바로 그런 초객체다. 우리는 뉴스에서 극지방 빙하가 녹는다는 통계를 보지만, 그 실체를 실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엘리아슨은 이 거대한 추상적 위기를 도시 한복판으로 끌어와 관객의 몸과 감각 속으로 직접 끌어들인다. 녹아내리는 빙하의 물방울 소리, 손끝에 전해지는 얼음의 차가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드는 얼음의 무게, 주변 공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냉기까지. 관객은 더 이상 기후 변화를 ‘저 멀리 있는 문제’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은 모턴이 강조한 “모든 예술은 이제 생태적이다”라는 선언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현한다. 전통적인 풍경화가 자연을 ‘그림’으로서 객체화했다면, 《Ice Watch》는 자연을 ‘함께 존재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관객은 빙하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빙하와 물리적으로 교감하는 존재가 된다. 얼음이 녹으면서 바닥에 고이는 물, 그 물이 신발을 적시는 순간, 관객은 자신이 이미 기후 변화라는 초객체의 일부라는 ‘이상한’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의 시간성이다. 설치 기간 동안 빙하들은 서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녹아 사라진다. 이는 기후 변화가 ‘미래의 위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인 과정’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모턴의 용어로 말하자면, 초객체의 ‘이상함(strange strangeness)’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익숙한 도시 풍경 속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은 낯설고 불편하며, 동시에 강렬하게 현실적이다. 관객은 이 불편함 속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엘리아슨의 《Ice Watch》는 예술이 초객체를 ‘느끼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기후 위기를 숫자와 그래프로만 접했던 사람들이, 실제 빙하를 만지며 “아, 이것이 녹고 있구나” 하고 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예술은 철학과 실천 사이의 다리가 된다.
결국 올라퍼 엘리아슨의 이 작품은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 인간을 직접 밀어 넣는 것. 관객으로 하여금 ‘초객체와 함께 이상하게 존재하는’ 감각을 체험하게 하는 것. 《Ice Watch》는 바로 그런 생태적 예술의 강력한 모범이며, 기후 변화 시대에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하고도 시적인 실천 중 하나다.
Olafur Eliasson, Ice Watch, 2018, 사진출처: DEZEEN
약 2,300년 전,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출신의 철학자 장자(莊子)는 『장자』 「제물론(齊物論)」에서 선언을 한다.
“천지와 나와 내가 함께 존재한다(天地與我並生). 만물과 나는 하나다(萬物與我爲一).”
장자는 인간과 나비, 인간과 나무, 인간과 미생물 사이에 본질적인 경계가 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꿈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가 깨어나 자신이 장자였는지, 나비였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된 경험을 통해, 존재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이고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모든 것은 평등하며(萬物齊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물화(物化)’의 과정 속에 놓여 있다.
장자에게 세상은 인간이 지배하거나 소유하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거대한 하나의 흐름, 끝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며 서로를 스며들어가는 살아 있는 전체였다.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고, 바람은 다시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그 대지에서 다시 싹이 트는 — 이러한 영원한 순환 속에서 인간 또한 한 조각의 물(物)일 뿐이었다.
오늘날, 이 장자의 통찰은 생태 위기라는 전 지구적 현실 앞에서 예리한 칼날처럼 되살아난다.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의 급격한 붕괴, 미세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바다, 인간의 탐욕으로 사라져가는 열대우림과 북극의 빙하. 우리는 오랜 시간 자연을 ‘자원(resource)’으로, ‘개발 대상’으로 규정하며 살아왔다. 자연을 ‘객체’로 삼고, 인간을 ‘주체’로 세우는 서구 근대적 세계관이 가져온 결과다. 그러나 이제 그 세계관은 한계에 직면했다.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자가 말한 ‘물화’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미생물과 함께 호흡하고, 식물과 함께 탄소를 교환하며, 기후와 함께 몸을 맡기는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이라는 종(種)도 결국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web of life) 속에서 잠시 형태를 빌린 하나의 ‘물(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받아들임은 겸손이면서 동시에 해방이다. 인간 중심주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공생(共生)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전환은 특히 예술의 영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현대 생태미학(Eco-Aesthetics)과 바이오아트(Bio Art)의 많은 작가들은 이미 장자의 ‘물화’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식물의 성장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설치작품, 미생물과 협업하여 만들어지는 살아 있는 캔버스, 기후 변화로 변형되는 빙하의 소리를 담은 사운드 아트, 토양의 기억을 조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들. 이 작품들은 더 이상 ‘자연을 표현하는’ 예술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변화하는’ 예술이다. 관객은 작품 앞에서 그 변화의 흐름 속에 스스로를 위치짓는 참여자가 된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한지와 자연 염료, 토착 식물을 이용한 작업, DMZ의 생태계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 도시 속 버려진 땅을 다시 생명의 터로 되살리는 커뮤니티 아트까지. 이들은 장자의 철학을 동아시아적 감수성으로 재해석하며, ‘인간 너머의 시선’을 예술로 구현하고 있다.
장자의 통찰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떤 ‘물(物)’이 되고 싶은가?”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정복하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대신 거대한 생명의 리듬 속에서 함께 춤추는 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예술가라면 더욱 그러하다. 붓 대신 미생물을, 캔버스 대신 토양을, 갤러리 대신 숲을, 그리고 인간의 시선 대신 만물의 시선을 빌려오는 작업을 해야 한다.
천지와 내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 만물이 나와 하나라는 것.
이 고대의 지혜가 동시대 예술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역할은, 바로 이 ‘물화’의 감각을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되새기는 일이다. 관객이 한 작품을 보고 나서, 자신의 몸이 ‘나’가 아니라 미생물과 식물과 바람과 연결된 거대한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생태적 전환일 것이다.
장자의 나비는 아직도 날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나비와 함께,
이 지구라는 거대한 꿈속에서 깨어 있어야 할 때다.
莊子, 齊物論, 사진출처: zhi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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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효 박사, 아트코리아 Why포럼 대표
'감정과 사유의 깊이를 시각 및 언어로 풀어내는 아티스트'로서, 뉴욕 Pratt Institute 디자인 석사학위, 홍익대에서 '메를로 퐁티의 몸현상학, 칼융의 꿈, 장자 철학의 비교연구'로 동양화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칼융의 심리학에 근거한 MBTI & 건축계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Iowa 주립대, Florida 주립대 초빙교수, 숭실대 대학원 주임교수 및 평생교육원 원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