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네가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괴롭히는 사람 같잖아.”
미경의 말이 끝났다.
- 쌍년.
그 말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내가 정말 입 밖으로 낸 줄 알았다. 하지만 입술은 다물려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손등을 덮고도 천이 조금 더 늘어났다.
“내가 뭘 했는데?”
미경이 물었다.
- 미친 새끼. 방금 네가 다 말했잖아. 내가 가만히 있는 게 싫다고.
그 말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졌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미경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봐. 또 숨네.”
나는 소매 끝을 놓지 못했다. 입 안에는 아직도 쌍년이라는 말이 남아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학교생활은 시간표처럼 시작됐다.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전공 실기. 오후 한 시, 음악사. 화요일에는 시창과 청음, 수요일에는 교양 수업. 시간표의 칸마다 과목명이 반듯하게 들어차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몇 번이고 접었다 폈다. 접힌 선은 점점 하얗게 닳았고, 글자들은 머릿속에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외우는 일은 쉬웠다. 어느 건물에서 몇 시에 수업을 듣는지, 어떤 악보를 준비해야 하는지, 연습실이 언제 비는지. 정해진 것들은 틀릴 일이 적었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둘씩 셋씩 모였다. 누군가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였고, 누군가는 입학식에서 처음 만났다면서 벌써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웃음이 사람들 사이를 가볍게 오갔다. 나는 그 곁을 지날 때마다 가방끈을 두 손으로 잡았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면 소매를 잡아당겼다. 엄지손가락으로 옷감 끝을 문지르고, 손등을 조금 더 덮었다.
그 옷은 손목에 딱 맞았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소매를 끌어내렸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악보를 펴고, 의자를 맞추고, 첫 음을 누르면 됐다. 누군가의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되었고, 내가 웃어야 하는 순간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피아노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정확하게 누르라고 했다.
첫 전공 실기 수업은 음악대학 3층의 개인 레슨실에서 진행됐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는 누군가 연주하고 있었다. 음이 몇 번 끊겼고, 멈춘 뒤에는 악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문 옆에 붙은 수업표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은 어중간하게 있었다.
나누리.
이름 옆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수석이라는 말도, 내가 어떤 학생인지 알려주는 말도 없었다. 나는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학생 하나가 나왔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학생은 악보를 가슴에 붙인 채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문을 두드렸다.
고연진 교수는 창가 쪽 바카라상에 앉아 있었다. 바카라상 위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파일과 물병, 연필 몇 자루가 놓여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 커튼 끝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오래된 건물 안으로 바람이 드나드는 길이 어딘가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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