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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마음의 경보다

by은파랑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아카데미아.
철학자 플라톤이 손에 회초리를 든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곁에 있던 이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지금 화가 나 있네.
그래서 이 종을 벌하는 중이지,
벌을 내리는 중이 아니라네."

회초리를 내려놓고 그는 기다렸다.
화가 가라앉은 뒤에야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다시 헤아렸다.
이천 년이 넘은 이야기지만
이 장면에는 화를 다루는 가장 오래된 지혜가 담겨 있다.
불길이 가장 높을 때는 불길을 읽을 수 없다.

1982년, 심리학자 제임스 에버릴은
사람들에게 한 주 동안 화가 난 순간을 일기로 적게 했다.
기록을 모아 보니 뜻밖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의 대상은 낯선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대부분의 화는 주먹이 아니라
말을 삼키거나, 한숨을 쉬거나, 자리를 뜨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화가 시작된 자리에는 같은 문장이 놓여 있었다.
"이건 부당해."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야."
화는 아무 데서나 터지지 않았다.
마음이 지켜온 선을 누군가 넘었을 때 울렸다.

그래서 화는 소음이 아니라 경보다.
연기 냄새를 맡은 감지기가 울리는 것처럼
내 마음 어딘가가 침범당했다고 알리는 소리.
존중받지 못했다는 아픔,
애써 한 일을 몰라준 서운함,
말하지 못한 부탁이 쌓이다 못해
가장 큰 목소리로 바뀐 모습.
화의 아래쪽에는 대개 상처가 앉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경보를 꺼 버리는 법을 두 가지로 배웠다.
하나는 눌러 담기다.
"화내면 안 돼. 참는 사람이 어른이야."
다른 하나는 쏟아 내기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야 풀려."

2002년, 심리학자 브래드 부시먼이
두 번째 믿음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화가 난 참가자들에게 샌드백을 치게 했더니
다 치고 나면 오히려 상대에게 더 공격적이 되었다.
분풀이는 불을 끄는 물이 아니라
불에 붓는 기름에 가까웠다.

눌러도, 쏟아도 풀리지 않는다면
남는 길은 하나다.
경보가 무엇을 알리는지 들어주는 일이다.
숨을 한 번 길게 내쉬고
"나는 지금 무엇을 침범당했다고 느끼지?"
조용히 물어보는 일이다.

화가 가리키는 방향은 화난 대상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내 마음의 필요다.

"그 말이 아팠어요."
"혼자 다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쳤어요."
경보의 뜻을 말로 번역해 건네면
상대는 비난이 아닌 부탁으로 들을 수 있다.
같은 화도 번역되고 나면
관계를 부수지 않고 관계를 고치는 소리가 된다.

화가 너무 자주, 너무 거세게 찾아와
나나 곁의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경보기가 쉬지 않고 울린다면
소리만 줄일 게 아니라 점검이 필요한 것.

화는 나를 망가뜨리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려고 울린 소리다.
소리를 끄는 대신 알아듣는 순간,
경보는 비로소
고요한 안부가 된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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