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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시간이라는 감옥에서

by은파랑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잊는다.
열쇠를 잊고
우산을 잊고
어제 한 약속을 잊는다.

하지만 어떤 망각은
열쇠처럼 되찾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병이라고 부른다.

잊다와 잃다.
받침 하나가 다를 뿐인데
하나는 지나가고
하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잊은 사람은 다시 떠올리면 되지만
잃은 사람은 떠올릴 자리가 없다.
기억과 기록은 소리가 닮았어도
기록은 종이에 남고
기억은 사람에 남는다.

사람이 흔들리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소설가 김영하는
일흔 살 노인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은 말렸다.
게다가 치매 이야기라니

그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쓰다가 어느 날 문득
이것은 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소설의 화자는 김병수
산기슭 집에서 딸 은희와 사는 수의사
오래전 마지막 살인을 끝으로 칼을 놓은 사내
이제는 제 기억을 믿을 수 없는 노인

그는 매일 일기를 쓴다.
잊지 않으려고
적어 두면 남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적은 사람이 흔들리면
적힌 것도 함께 흔들린다.

소설은 처음부터 말한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그것이 그를 움직였다.
그런데 끝에 이르면
독자는 묻게 된다.
고백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화자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화자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이미 진실이 아닐 때
세계는 안쪽부터 무너진다.

한 평론가는 이 바카라을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공포 체험의 기록이라고 불렀다.

안개 낀 산기슭에서는
가까운 것부터 사라진다.
먼 산이 아니라
발밑의 길부터 지워진다.

병수의 안개도 그랬다.
먼 과거가 아니라
오늘 이름부터
오늘 얼굴부터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감옥의 벽은 시간이고
벽을 허무는 열쇠는 기억인데
열쇠가 먼저 녹슬면
죄수는 제가 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된다.

기억하는 사람은 죄를 안다.
잊은 사람은 죄를 모른다.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은 이의 몫이 될 뿐

내가 기억하는 나는 정말 나인가
내가 지운 일은 정말 지나간 일인가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덮어 두었는지
선택이 사람을 만든다.

떠올린다.
내가 일부러 흐리게 둔 장면
그리고 묻는다.
누구의 기억 속에
어떤 얼굴로 남아 있는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 몇 가지를
날마다 적어 두는 사람이면 된다.
더불어 곁에서
함께 읽어 줄 한 사람이 있으면 된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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