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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라고 말한 뒤에 남는 것

by은파랑

착하다.
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가 붙여준 이름인지 궁금해진다.

내가 나를 그렇게 불렀던가
아니면 곁의 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쓰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었던가

착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한 칸씩 작아졌다.
그 말은 칭찬의 얼굴을 하고
거절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약속을 받아갔다.

1945년, 뉴욕.
독일에서 건너온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는
'우리의 내적 갈등'이라는 바카라을 펴냈다.

진료실에서 오래 마주한 사람들 가운데는
유난히 상냥한 이들이 있었다.
부탁을 받으면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싫은 기색은 얼굴에 올리지 않았다.

호나이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계산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다정하면 미움받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맞춰주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불안을 달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불안을 다루는 길을
세 갈래로 나누었다.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길,
사람에 맞서는 길,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길

그중 첫 번째 길에 선 사람들은
애정과 인정을 얻기 위해
자기 마음의 목소리를 조금씩 줄여갔다.

착함이 몸에 밴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늘 아무거나 좋다고 말했다.
정말로 아무거나 좋았던 것이 아니라
내 입맛이 누군가의 기분을 거스를까 봐
먼저 접어두었던 것

야근을 부탁받은 저녁에는
약속이 있다는 말을 목 안으로 삼켰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창에 비친 내 얼굴이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웃고 있었는데
웃음을 누가 대신 지어준 것 같았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마음이 넓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미움받을 자리가 두려워서
스스로 좁은 방에 들어가 있는 일

방 안에서
나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고
나에게는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나 착함과 선함은 같은 말이 아니다.

선한 사람은
거절할 때도 다정할 수 있다.


싫다는 말과 사랑하는 마음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살 수 있다.

반면 두려움에서 나온 착함은
거절하는 순간
관계가 끊어질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숨을 한 번 고르는 일,
생각해 보고 알려줄게라고
삼십 초쯤 시간을 벌어보는 일

처음에는 목소리가 떨렸다.
거절 하나에도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은 닫히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잠시 서운해했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편안해했다.

내 거절이 닿은 자리에서
관계는 부서지지 않고
조금 더 정직해졌다.

네,라는 대답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할 때
비로소 선물이 된다.

선택할 수 없는 승낙은
호의가 아니라 습관이다.

작은 선택 하나를 해본다.

먹고 싶은 것을 말하고
쉬고 싶은 저녁을 지킨다.

그리고 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본다.

누가 대신 지어준 웃음이 아니라
내가 지은 웃음이
조금 서툴게 걸려 있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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