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저 온다

by은파랑

1920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바닷가 묘지에 서서 한 줄을 적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죽은 이들의 흰 무덤 위로
소금기 어린 바람이 건너오자
멈추어 있던 삶을 다시 집어 들었다.

훗날 일본의 소설가 호리 다쓰오는
그 시구를 제목 삼아 이야기를 썼다.
병든 연인 곁에서 지켜 낸 짧고 고운 계절

바람이 분다.
단 네 글자가
사람을 일으켜 세운 적이 있었다.

바람이라는 말
부는 바람, 바라는 바람
소리는 같고 뜻은 둘이어서 하나처럼 불어온다.

불어오는 것은 잡히지 않고
바라는 것도 잡히지 않아
둘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며 서로를 닮았다.

그러나 바람은 지나간 자리마다 흔적을 남긴다.
풀잎이 눕고, 옷깃이 떨리고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의 창이 삐걱 열린다.

좋다는 말
이유를 달면 작아지고
이유를 지우면 커지는 말

사랑한다는 말에는 까닭이 따라붙지만
좋다는 말에는 까닭이 없다.
그저 그 사람 쪽으로 몸이 기우는 일이다.

그러니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두 문장은 한 문장이다.
바람이 불어서 당신이 떠올랐고
당신이 떠올라서 바람이 불었다.

머리칼이 이마를 쓸고 가던 길목
이름 하나가 먼저 와 서 있던 모퉁이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을 정하는 일이 아니라
바람결에 마음이 먼저 기울어 있음을 알아채는 일

살아야겠다던 시인의 다짐은
어쩌면 이 말의 다른 얼굴이었다.
좋은 사람이 있어 살고 싶어지는 일

당신은 묻는다.
왜 하필 바람 부는 날이냐.

대답 대신
창문을 조금 열어 두고
당신이 오는 쪽으로 의자를 돌려놓는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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