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가득한 사무실에서 그는 시간을 의심했다
1905년, 스위스 베른.
특허청 사무실에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전기장치와 기계의 도면이 바카라상 위에 펼쳐졌다. 직원들은 발명품의 설명을 읽고 그것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 검토했다.
창밖으로 전차가 지나갔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었다. 한 청년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스물여섯 살이었다. 대학교 교수도 아니었다. 유명한 물리학자도 아니었다. 스위스 특허청 기술심사관이었다.
사람들은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몇 시인가. 아인슈타인은 조금 다른 것을 생각했다. 시간이란 정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흐르는 것일까.
시계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음 초로 넘어갔다. 하지만 청년은 당연한 1초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 울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를 둘러싼 이야기에는 과장이 많다.
특히 그가 학교에서 수학을 못했다거나 수학에서 낙제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강한 관심과 능력을 보였다.
다만 학교의 권위적이고 암기 중심적인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답을 외우는 것보다 원리를 알고 싶어 했다.
왜 그런가. 왜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 유명한 물건이 하나 있다. 나침반.
아인슈타인은 훗날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보여준 나침반이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회상했다.
바늘을 돌려놓는다. 다시 북쪽을 향한다. 또 돌린다. 다시 돌아온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바늘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에게 그것은 이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과학은 보이는 것을 많이 아는 일만이 아니라, 보이는 현상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끝까지 묻는 일이기도 하다.
1896년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의 스위스 연방공과대학교에 입학했다.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졸업했다고 곧바로 학자의 길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남아 연구하고 싶었지만 원하는 조교 자리를 얻지 못했다. 추천과 인간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곳에 지원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이름 뒤에 ‘천재’라는 말을 붙인다. 하지만 스무 살 무렵의 아인슈타인에게는 미래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았다.
졸업장은 있었다. 하고 싶은 연구도 있었다. 그런데 자리가 없었다.
1902년,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의 도움으로 그는 베른의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하게 됐다.
발명가가 제출한 서류를 읽었다. 장치의 원리를 파악했다. 설명이 논리적으로 맞는지 살폈다. 도장을 찍었다. 다음 서류를 펼쳤다. 또 읽었다. 그것은 그가 꿈꾸던 대학 연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현재 앉아 있는 바카라상이 생각이 갈 수 있는 거리까지 결정하지는 않는다.
퇴근 후 아인슈타인은 친구들과 만났다. 모리스 솔로빈과 콘라트 하비히트 등이 함께했다. 그들은 철학과 과학바카라을 읽었다. 흄. 마흐. 푸앵카레. 이 모임을 장난스럽게 ‘올림피아 아카데미’라고 불렀다.
화려한 연구기관은 아니었다. 거창한 실험장비도 없었다. 바카라. 대화. 질문. 그리고 상상. 아인슈타인이 특히 잘했던 것은 머릿속에서 실험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고실험’이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다. 만약 내가 빛을 따라갈 수 있다면 어떻게 보일까.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빛은 멈춰 있는 파동처럼 보일까. 기차 안에 있는 사람과 승강장에 서 있는 사람은 같은 사건을 똑같은 시간에 일어났다고 판단할까.
질문은 현실에서는 쉽게 만들 수 없는 상황을 머릿속에 만들어냈다. 그리고 익숙한 상식을 흔들었다.
천재적인 질문은 반드시 어려운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때로는 아이처럼 이상한 상황을 끝까지 상상하는 데서 시작된다.
당시 물리학에는 오래된 믿음이 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른다는 생각이었다.
한 장소에서의 1초와 다른 장소에서의 1초.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과 서 있는 사람의 시간. 우주 어디에서나 동일한 절대적인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뉴턴 역학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자기학과 빛을 설명하는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문제가 나타났다. 특히 빛의 속도와 기존의 운동 개념을 함께 놓으면 익숙한 직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생겼다.
아인슈타인은 물었다. 빛의 속도가 모든 관성계에서 같다면,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시간을 기준으로 자연을 설명해 왔다. 아인슈타인은 반대로 시간 자체를 질문했다.
벽시계는 여전히 똑같이 움직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어떨까.
1905년. 아인슈타인의 삶에서 특별한 해가 찾아왔다. 훗날 ‘기적의 해’라고 불리게 된다. 그는 그해 여러 편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빛의 양자적 성질과 광전효과를 설명하는 연구. 브라운 운동을 분석해 원자의 실재를 뒷받침하는 연구. 특수상대성이론. 그리고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로 이어지는 연구. 그중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흔들었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완전히 독립된 절대적인 무대가 아니었다.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시간 간격과 공간의 측정은 달라질 수 있었다. 동시성조차 단순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말하려면 시계를 어떻게 맞출 것인가. 시계를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빛에는 이동 시간이 있다.
그렇다면 ‘동시에 일어났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질문은 당시 철도망과 전신이 발달하면서 서로 떨어진 장소의 시계를 정확히 맞추려 했던 시대적 문제와도 묘하게 닿아 있었다.
특허청의 바카라상 위에는 전기와 시계, 신호에 관한 기술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그것들을 넘어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시계를 보고 있을 때, 그는 시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혼자 갑자기 떠올린 사람’으로만 만들면 중요한 것이 사라진다.
그보다 앞서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있었다. 로런츠가 있었다. 푸앵카레가 있었다. 마흐를 비롯한 사상가들의 문제의식도 있었다.
과학은 어느 날 한 천재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 세우는 성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벽돌을 놓는다. 어떤 사람은 벽을 만든다. 어떤 사람은 창문을 만든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동안 모두가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인슈타인이 특별했던 것은 앞선 연구를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들을 깊이 바라본 뒤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다시 물었다는 데 있었다.
새로운 생각은 지식을 버릴 때가 아니라, 충분히 배운 뒤 그 지식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다시 질문할 때 태어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익숙한 방식과 기존의 가정에 붙잡혀 새로운 해결바카라을 보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할 때 ‘기능적 고착’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망치는 못을 박는 물건이다. 컵은 물을 마시는 물건이다. 우리는 익숙한 용도를 먼저 떠올린다. 생각도 비슷하다. 원래 그런 거야. 다들 그렇게 해.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어. 이 말들은 편리하다.
매번 세상을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당연함은 삶을 효율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가끔은 감옥이 된다. 아인슈타인의 사고가 보여주는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태도가 아니다.
그렇게 살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반복될 때, 익숙한 답을 더 세게 붙잡는 대신 그 답의 전제를 한번 살펴보는 것이다.
좋은 질문은 답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답이 서 있는 바닥을 살펴본다.
1905년의 논문들이 발표됐다고 다음 날 세상이 갑자기 바뀐 것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도 곧바로 세계적인 유명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과학계의 관심은 점차 커졌다. 그리고 그는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며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특수상대성이론으로도 그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중력이 남아 있었다. 뉴턴은 중력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또 물었다. 중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질문을 붙잡고 여러 해를 보냈다.
틀렸다. 다시 계산했다. 막혔다. 동료 수학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그리고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중력은 단순히 멀리 떨어진 두 물체가 서로 잡아당기는 힘으로만 이해되지 않았다.
질량과 에너지가 시공간을 휘게 하고, 물체는 그 휘어진 시공간을 따라 움직인다는 새로운 그림이 나타났다.
우주를 바라보는 방법 자체가 달라졌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시간이다.
1905년의 젊은 천재가 모든 것을 한 번에 알아낸 것이 아니다. 질문 하나를 붙잡고 거의 10년을 더 걸었다.
좋은 질문에는 때때로 좋은 답보다 더 긴 인내가 필요하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흥미롭게도 상은 상대성이론 자체보다 특히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에 대한 공로를 중심으로 주어졌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상대성이론과 거의 붙어 있지만 당시 과학계가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훨씬 복잡했다.
과학은 유명한 공식 하나로 발전하지 않는다. 검증한다. 반박한다. 다시 계산한다. 관측한다.
다른 연구자가 확인한다. 아인슈타인 역시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을 둘러싼 그의 태도는 후대 물리학자들과 긴 논쟁을 낳았다.
그 역시 자신의 직관과 씨름했다. 천재라고 틀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힘은 천재조차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질문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결국 ‘혹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 인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쉽게 아름다운 공식을 만든다.
특허청 직원도 포기하지 않으면 천재가 될 수 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면 성공한다. 질문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인슈타인은 뛰어난 수학적·물리학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교육을 받았다. 앞선 과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지식이 있었다. 친구와 동료가 있었다.
그의 연구를 읽고 평가하고 발전시킨 과학 공동체가 있었다.
특허청 생활 역시 낭만적인 ‘실패의 시기’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생계를 가능하게 한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이었고, 동시에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삶에서 가져올 것은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고 천재가 되라는 교훈이 아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회사원이어도 된다. 학생이어도 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도 된다. 아직 원하는 자리에 가지 못했어도 된다.
현재의 명함과 생각의 크기는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시계를 본다. 몇 시지. 언제 끝나지. 나는 왜 이렇게 늦었지. 친구는 벌써 취업했는데. 누구는 벌써 돈을 벌었는데.
누구는 결혼했는데. 누구는 성공했는데.
시계는 어느 순간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라 나를 재촉하는 물건이 된다.
스물다섯. 서른. 마흔.
사람들은 각 나이에 해야 할 일을 정해놓는다. 그리고 조금 늦으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물리학적 시간과 인생의 시간을 억지로 같은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다만 그의 질문하는 태도만큼은 가져올 수 있다. 왜 모두 같은 시간표로 살아야 하지. 왜 늦었다고 생각하지. 누가 기준을 만들었지.
내가 정말 늦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시계를 의심할 필요는 없어도, 시계에 적어놓은 인생의 시간표는 한 번쯤 의심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원래’를 배운다. 원래 회사는 그런 곳이야. 원래 사람은 안 변해. 원래 이 나이에는 이 정도는 해야 해. 원래 성공하려면 이런 길로 가야 해.
대부분의 ‘원래’는 삶을 편하게 해 준다. 매번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같은 문제 앞에서 계속 막히는 날에는 답을 더 열심히 찾기 전에 질문을 한번 바꾸어볼 필요가 있다.
혹시 내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정말 당연한가. 1905년 특허청 벽에서도 시계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째깍. 째깍. 사람들은 그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한 청년만 그 시간 자체를 다시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답이 보이지 않는다면 지식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하지 말자.
때로 우리를 막고 있는 것은 답의 부족이 아니라 너무 오래 의심하지 않았던 전제 하나일 수 있다. 째깍. 세상은 계속 익숙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속에서 조용히 ‘왜?’ 하나를 놓아보자. 세상을 바꾼 질문은 언제나 새로운 것 앞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 것 앞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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