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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사후 처리를 시작합니다

K의 실연수첩[1]

byall or review
@ChatGPT


"우와~ 대단하시네요~! 1년 만에 체지방이 엄청 줄었어요!"


의사는 K의 건강검진 결과지를 보며 감탄했다. 흥미로운 듯 천천히 K의 치부를 훑어나갔다. 손가락으로 쭉 그래프를 따라가면서. 물론 그래봐야 고도비만에서 중도비만 수준으로 내려온 것에 불과했다.


BMI 수치는 여전히 높았다. 펄럭이는 종이 속 사람도 여전히 배불뚝이었고.


"위고비, 마운자로 그런 거. K님한테는 나쁜 거 아니에요. 원래 K님 같은 분들이 맞으면 딱 좋아요."

"... 안 해요. 그런 거."

"아.. 그럼 어떻게 빼셨어요?ㅎㅎ 저도 그 비결 좀 알고 싶은데요??"


의사는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슬롯생활 티가 나는 너스레였다.


K의 입이 달싹였다. 어색한 공기에 저절로 입을 벙끗거렸다. 차마 목에서 소리가 튀어나오진 않았다.


실..

실연..


차마 '그녀가 떠나감'이라 말하지 못했다.

짝사랑의 실패. 고백 차임. 실연.

좌절, 절망, 고통, 한심함.

복합적인 그런 것.


K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3초간의 정적.


시계 소리만 똑딱, 똑딱, 똑딱. 시계침이 건조하게 공기를 뚫었다.


결국 K는 입가에 미소만 머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에 사탕이라도 하나 물고 있는 듯 입 혀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자, 그럼!"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한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앞마당에 말려놓는 고추들처럼. 가지런히. 공손한 말투로.


"장단기적인 목표를 세워서~ 숨이 찰 정도의 운동을 일주일에 3번씩~ 식단을 병행하며~"


볼펜으로 똥글뱅이를 쳐가면서 휙휙.

더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아, 한 가지는 귀 담아들을 법도 했다.


"파이팅!"


물론, 듣지 않았다.


의사의 몇 가지 조언(예컨대 '지금처럼', '이 기세로 쭉' 등)을 듣던 K는 진절머리가 날 것만 같았다.


의사 양반. 이건 기세가 아니라 발버둥이야.

전혀 기쁘지 않아.

전혀.



K의 눈빛


K는 의사와의 진부한 상담을 마치고 터덜터덜 건강센터를 걸어 나왔다.

한낮인데도 길거리의 쨍한 간판 불빛들이 K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 성지', '상담 환영'


휴대폰 대리점 앞에서 "상담 한번 받아보고 가세요~!" 호객행위를 하는 청년이 K와 눈을 맞췄다. K는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열심히 사시네. 하지만 당신의 열심과 내 상담여부는 별개잖아?'


K는 의사와의 상담 이후 심보가 단단히 틀어진 모양새였다.


K는 터덜터덜 걸으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모두 다 각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를테면 남해안 리아스식 해안의 섬처럼) 아닐까 생각했다.


다가갈 수 없이 멀리서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처럼 말이다.


딱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K가 짝사랑하는 L이었다.


L은 K가 이따금씩 '멀리서 바라만 봐야한다'는 '거지 같은 생각(L의 표현대로라면)'을 할 때마다 'F인척 하는 T'라고 놀리곤 했다.


"내가 너 몇 년 전부터 계~속 말했지? F 아니라고!? 원래 MBTI는 자기가 되고 싶은 이상형을 말하는 거래. 너 INFP 아니야."


그럴 때마다 K는 L을 바라봤다. 장난과 애정,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눈빛으로.


K가 다른 여자를 볼 땐 절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눈을 약간 치켜뜨면서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쌍스러운 표정(L의 표현대로라면)'을 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L은 그 눈빛을 한번도 알아채지 못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을 수도.


지옥 앞에서


@ChatGPT

건강검진 센터를 나오자마자, K는 허기를 느꼈다.


내시경을 받기 위해 16시간째 공복이었다. K는 빈 속을 부여잡고 지도앱을 켰다.


'여기 근처에 죽집이 있던가'


분명 낯이 익었지만 알 수 없는 동네 여의도. 여의도 한복판에서 K는 한 번도 쳐보지 않았던 단어를 검색했다.


'죽'


K는 그 와중에 '싼 죽' 혹은 '맛있는 죽'이라고 검색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곧 핸드폰 화면에 온갖 죽 프랜차이즈가 죽 늘어졌다.


K는 제일 가까운 죽집에 들어갔다. 그리곤 한참 동안 소고기야채죽을 꼭꼭 씹어먹었다.

의사의 강력한 권고("오늘은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시고~" 등)를 어느새 받아들이고 있었다.


죽을 꼭꼭 씹으면서도 정제탄수화물과 단백질, 칼로리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걸 먹으면 또 살찌겠지? 차라리 야채죽을 먹을걸. 아니지. 차라리 미음을 먹을걸. 그냥 먹지 말걸.'

의미 없는 후회만 반복했다.


K는 그날 이후로 매일 후회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후회 뒤에 따라오는 혼잣말도 매번 똑같았다.


고백하지 말걸.

말하지 말걸.

하지 말걸.

왜 그랬지.

이 멍청아.


K는 자바카라으로 삶을 물들였다. 더 어둡고 음침하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면서.


누가 그랬던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K의 짝사랑도 지옥으로 이어졌다.


지옥에 발을 담그려는 순간, K는 깨달았다.


아, 여기가 지옥이구나.

사랑이 나를 지옥으로 이끌었구나.

누나. 정신 차려보니, 여기 지옥이네요.

전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K는 회사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건강검진 끝났습니다. 복귀하겠습니다"


대댓글로 팀장님의 체크 표시가 달렸다.

그제야 K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옥철이었다.


*이 글은 실화에 입각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매주 연재해보려고 합니다.

쑥쓰럽지만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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