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간 속으로 최종화
"준겸아, 잘 잤어?"
"네. 뭐... 새벽에 두어 시간 자긴 잤어요."
"......"
"선배는요?"
"너보다는 더 잔 것 같은데... 오늘 몽생미셸까지 운전은 내가 할게. 너 눈 좀 붙여."
어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는 두 사람. 진한 커피향으로 맑지 않은 정신을 깨워본다.
서연은 어느 정도 이럴 걸 예상했었지만... 준겸을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 지 생각보다 더 난감하다. 잠을 못잔 몽롱함만큼이나 두 사람 간의 거리도 뿌연 안개 속에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
투르에서 몽생미셸로 가는 길. 어색함을 없애보려고 서연이 음악을 듣자고 하자, 준겸이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블루투스로 연결한다.
"선배, 전 눈 좀 붙일게요."
"어, 그래. 자."
준겸이가 평소에 좋아하는 곡들인가? 듣다보니 공통점이 보인다.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마음...
'그동안 나한테 하고싶은 말들이었나?'
서연도 준겸이 싫지 않다. 아니, 그 마음에 감동한 지는 벌써 오래 전이고 이젠 준겸이가 남자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 어젯밤엔 많이 흔들렸다. 서연이 아끼는, 그리고 서연이를 아껴주는 후배만 아니었더라면 같이 자고 싶었다. 그만큼 남자로서의 매력에 끌렸다.
본능이 시키는대로 하지 못한 건, 이번 여행을 떠난 이유, 즉 선우가 남긴 메시지를 아직 찾지 못해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이 선명해지기 전까지는 본능이나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준겸의 진심이, 서연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기에, 섣불리 행동해선 안될 것 같았다. 그에게 상처주는 일이 생길까봐 두려웠다.
'내가 외롭다고 곁에 두는 건 준겸이의 마음을 이용하는 거잖아. 어제 느낀 감정은 일시적인 걸 수도 있는데...... 내 마음이 뭔지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말자.'
준겸의 플레이리스트는 좋은 드라이브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 중에는 서연이 좋아하는 곡들도 있었고 처음 들어보지만 가슴을 울리는 좋은 곡들도 많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달려, 서연은 드디어 노르망디 지방의 대표 유적지인 몽생미셸 앞에 도착했다.
"준겸아.. 준겸아? 이제 일어나. 다 왔어."
서연의 목소리에 눈을 뜬 준겸, 정면의 시계를 본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니......'
준겸은 서연이가 내내 혼자 운전을 하게 만든 게 미안해진다.
차에서 내린 둘은, 한참을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서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에서 보던 그 풍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준겸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로도 유명한 곳!
'성 미카엘의 산'이라는 뜻의 몽생미셸은, 708년 대천사 미카엘을 꿈에서 만난 오베르 주교가 미카엘의 지시로 지었다고 알려진 수도원과 그 주변을 둘러싼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섬으로, 섬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사이에 위치한 이 신비로운 바위섬은, 물길이 바뀔 때마다 서로 자기 고장에 속한다는 주장으로 두 지역간 분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말을 서연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몽생미셸은 늘 같은 자리에 있는데 썰물 때 물길의 변화만으로도 그걸 달리 보고 서로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게 인간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심지어 같은 관계 속에서 마주보고 있다 해도, 너와 나는 다른 모양을 살고 있다. 그 결과, 다른 기쁨과 다른 슬픔으로 점철된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희극이고 또한 비극이다.
살기 위한 본능이란, 영육의 생존 욕구를 모두 포함하는 것. 외롭고 힘들 때 식욕이나 성욕이 더 강해질 수도 있는 건, 그것을 채움으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가장 솔직한 자기다움을 공감받을 수 있는 순간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함께 맛있는 걸 먹으며 저절로 번져나오는 미소, 함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느껴지는 환희, 그것만큼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고,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또 있을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데 말이 더 필요없는 순간! 그 순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누린다면 더없는 행복이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 더더욱 인간은 더욱 먹고 자는 기본욕구에 집착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본의 아니게 상처 받고 상처 주게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서연은 어제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어지는 한편, 궁금해진다.
'어젯밤 내 마음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그게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아무 말도, 더이상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고 서연은 다짐해본다.
***
수도원으로 오르는 길. 수많은 계단을 오르며 숨이 가빠온다. 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준겸이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 멈칫 한다. 잡고 싶다. 어제처럼 그의 손을 붙잡고 올라가면 좀 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내 마음 속으로 도리질을 하며 생각은 생각으로 두기로 한다.
언제나처럼 서연의 반 보 옆에서 준겸은 묵묵히 걷고 있다. 어젯밤부터 그는 말수가 확 줄었다. 하루를 리플레이 할 수 있다면 꿈 같았던 어제 하루를 무한반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가 해놓고도 그 엉뚱한 상상이 어이없어서, 준겸은 혼자 피식 웃는다. 보일 듯 말 듯.
***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수도원의 내ㆍ외부를 다 둘러본 후, 준겸과 서연은 내려오다가 보이는 첫번째 크레프리로 들어갔다. 서연은 걀레뜨(galette 메밀전병 같은 색의 식사용 크레프. 프랑스에서는 단 맛이 있는 디저트용만 crêpe 라고 부름)를 주문한다. 둘이 반씩 잘라 나눠먹기로 하고 쟝봉-프로마쥬(jambon-fromage 햄 치즈)와 외프-샹삐뇽(œuf-champignons 댤걀 버섯) 두 종류를 시켜본다. 준겸은 얼른, 시드르 두(cidre : 사과주. 노르망디의 특산품. cidre doux는 알콜도수가 낮고 brut 는 높다)를 추가로 주문한다.
"준겸아, 이거 술인데? 사과주."
"알아요. 여기서 에트르타까지는 제가 운전할 테니까 같이 곁들여 드세요. 시드르, 언젠가 선배가 좋아한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요."
"정말?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니? 챙겨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 혼자만 마셔서 미안.."
"괜찮아요. 선배가 맛있게 먹으면 전......"
준겸은 더 얘기하려다가 말끝을 흐린다.
본고장에서 먹는 걀레뜨 맛은 정말 훌륭했다. 서연은 운전하느라 좀 피곤해서였는지, 시드르 한두 잔을 마시니 노곤한 듯 기분이 좋아진다.
"크레프도 시키자. 먼 길 가려면 든든히 먹어야지."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