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간 속으로 15화
"선배! 잘 잤어요? 우리 같이 아침 먹으러 내려갈까요?"
준겸의 밝은 전화 목소리에서 서글서글한 눈웃음까지 다 보이는 듯하다. 서연은, 밤새 생각이 많았다. 어제밤엔 준겸의 제안에 '예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게 후회된다는 건 아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도 마음이 좀 복잡하다.
'어젠 내가 왜 그러고 싶었던 걸까? 좀 취해서? 외로워서? 24시간 연애...... 그래 뭐, 못할 거 없지. 좋아. 다 좋은데, 내가 준겸이 마음 더 다치게 하면 어쩌지? 그리고 하루 동안 연인모드였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갈 수가 있을까?'
그래도 약속은 약속! 서연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단 하루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여자로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어제까지는 편하게만 입고 다니다가 오늘은 딱 한 벌 챙겨온 하늘하늘한 쉬폰 원피스도 입어본다. 첫데이트 하러 나가는 여자처럼.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준겸은, 평소보다 화사한 서연의 모습에 눈이 커지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겨우 입을 뗀다.
"우와 선배! 오늘따라 더 예쁜데요?"
"그래? 고마워. 24시간 연인? 그거 뭐부터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몰라서 신경 좀 썼는데 괜찮아?"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배시시 웃는다. 준겸이 어색하게 손을 뻗어 서연의 손을 잡는다. 무슨 사춘기 소년 소녀도 아닌데 잡은 손이 너무 간질간질해서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둘은 손깍지를 끼고 발맞춰 계단을 내려간다.
***
호텔 다이닝 룸에 준겸과 마주앉은 서연은 어렵게 입을 뗀다.
"우리 말야, 24시간 후에도 여행 일정이 하루 더 남아있을 텐데 우리 너무 불편해지면 어떡하지? 다시 예전과 똑같이 지낼 수 있을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좋겠어요. 오늘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제 연인이 돼주세요. 저도 그럴게요. 그리고 불편해도 하루만 참으면 저 런던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니 괜찮을 거예요."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우리 얼른 아침 먹자. 커피 식기 전에."
"영국에서 맨날 맛없는 빵만 먹다가 저 요 며칠 아침이 행복해요."
작은 테이블 맞은편, 준겸의 환한 미소에 서연도 마음이 밝아진다. 맛있는 걸 함께 먹고 마주 웃기. 늘 일하느라 바빴던 엄마와도 자주 누려보지 못했던 작은 행복!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음껏 누리리라 생각했었는데 선우와도 이렇게 마주 앉아 여유롭게 아침을 함께 먹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연인이라면 하루의 시작이 참 좋겠다!'
서연은 준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둘은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중세의 성채를 둘러보기 위해 카르카손으로 향했다. 사실, 서연은 카르카손이 C 를 의미한다는 걸 알자마자, 그림엽서가 가리키는대로 바로 쉬농소로 출발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호텔리어 말대로 여기까지 언제 또 올까 싶어, 잠시라도 들러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Carcassonne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 옛이야기 속에나 나올 듯한 요새 도시는 정말 장관이었다. 서연은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파리를 떠나온 이후, 준겸과 내내 함께였지만 오늘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늘 한 걸음 뒤에서, 아니면 반 보 옆에서 동행하던 준겸이가 이젠 내 손을 잡고 걷고있네?'
따뜻하다.
엄마 체질을 닮아 손발이 늘 차가운 서연은 이런 온기를 참 오랜만에 느껴본다. 5년 넘게 그 누구와도 이렇게 손을 잡아본 적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란히 걷다가 놓치기 아까운 풍경을 만나면 여느 연인들처럼 같이 얼굴을 밀착하고 셀카도 찍어본다. 선우가 사라진 후, 서연은 점점 어두워지는 자신의 얼굴이 싫어서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여행이나 출장을 가서도 간간히 풍경만 담아오곤 했다. 그래서 준겸이 같이 사진 찍자고 했을 때 자동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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