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맛깔나다 45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바라고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미운털이 박히다니!
3·4·5학년, 3년 내리 남자 담임 선생님이었다. 여자 담임을 학수고대했고 드디어 6학년, 소원이 이뤄졌다. 한동안은 완벽했다. 선생님은 내게 무척이나 친절하셨고, 난 선생님이 좋았다. 그런데 수업 시간 질문 한 번에 나는, 끝내 *백조로 변신하지 못한 미운 오리 새끼로 남아버렸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한번 설명해 달라고 용기 낸 건데, 대답 대신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만 받았다. 내 말이나 태도, 표정이 너무 오만방자하니 무례했을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 그 수업 시간 이후부터, 선생님은 전생에 얼음공주였던 것처럼 냉기를 풍기며 나를 외면하셨다. 잘못이 있으면 혼을 내고, 반성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런 말도 없이 냉랭하기만 했던 이유가 여전히 궁금하다. 말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내가 개차반이었을까? 사랑받고 싶던 선생님께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움을 받는 건 고통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느끼는 거라고 애써 다독였지만, 쫄면이 말해준 진실은 냉정했다. 겨울방학 동안 담임 선생님이, 나와 친한 친구들을 읍내로 데려가서 쫄면을 사주셨다는 것이다. 나만 쏙 빼고 말이다. 선생님 집에도 갔다며 자랑했다. 왜 안 왔는지 묻는 친구들에게,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야’라는 말을 차마 못 하고, 얼머부렸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앙처럼 떠받들고, 선생님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라고 해도 믿고 살았는데, 왠지 모를 배신감에 울컥했다. 속상한 마음 들키기 싫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쓰는 내 맘을 알 길 없는 친구들은, 선생님이 사준 쫄면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긴 선생님이 사준, 이름도 생소한 쫄면을 먹는 호사는 아무나 누릴 수 없으니, 자랑할만했다. 나였어도 자랑했을 것이 뻔했지만, 배제된 자의 질투심이 낳은 복통은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 눈 밖에 난 이상, 나의 최선은 다가오는 졸업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 손으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니, 벗어나기라도 할 수밖에! 드디어 졸업식을 위한 예행연습날, 80여 명의 졸업생을 위해 작은 시골 학교는 분주했다. 노래와 축사 연습에 이어, 고대하던 순서가 다가왔다. 바로 갖가지 이름의 표창장 수여자 명단 발표였다. 국회의원이니 면사무장처럼 의리의리해 보이는 직함이 들어간 표창장은, 성적 우수상보다 훨씬 근사해 보였다.
자세히는 아니어도, 우린 누가 수상자 명단에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성적순이라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이름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상장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도도한 척 허세를 부리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맡겨놓은 물건 찾으러 온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가슴은 이미 두 근 반 세 근 반이었다. 선생님께서 호명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런데 끝내 내 엉덩이는 의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예상한 모두가 명단에 있었다. 나만 빼고 말이다. 이번에도 나만 빠졌다.
이게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졸업식장 한가운데로 많은 축하를 받으며 위풍당당 걸어가야 하는데! 표창장을 받으러 나가며 뻐기고 싶던, 은밀하고 완벽한 큰 그림이 산산이 부서졌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미워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동안 갈구했던 선생님을 향한 마지막 짝사랑도 실낱같은 희망도 남김없이 버렸다.
마지막 탈출구였던 졸업식마저 엉망이 될 줄이야! 졸업식장 근처에도 가기 싫은 내 마음도 모르고, 부모님은 아침부터 분주하셨고, 동생들은 졸업식 끝나고 먹게 될, 짜장면 생각에 신나 있었다. 졸업식 내내 선생님께 미움만 받고, 표창장도 못 받게 됐다는 억울함에 짜장면의 ‘짜’ 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웬걸, 잘도 넘어갔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새까만 짜장과 탱글탱글한 새 하얀 면발이 초록빛 플라스틱 그릇 안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샛노란 단무지까지 곁들이니, 알록달록 화려하기까지 했다. 그간의 억울함과 분노가 짜장면을 따라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고는 깔끔하게 소화됐다. 선생님이 사주셨다는 쫄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쫄깃쫄깃 짭조름하며 감칠맛 넘치는 짜장면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표창장 좀 못 받으면 어떻고 선생님 사랑 좀 못 받으면 어떤가! 맛있는 짜장면이 있는데 말이다. 힘들 때 힘들더라도 맛난 거 먹으며 다시 힘을 내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계획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지만, 행복의 순간은 어디에나 숨어 있다는 것을 맛본 졸업식을 끝으로, 우리 가족은 도시로 향했다. 시골 생활의 맛깔스러움 듬뿍 싸맨 이삿짐과 함께 말이다.
드디어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처럼 하얀 얼굴에 가느다란 팔다리, 긴 머리를 찰랑이는 존재들이 진짜로 ‘이랬니? 저랬니? 그랬니?’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설렜다. 하지만 한 편으론 ‘시골애’가 과연 ‘도시애’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그러나 내일은 또 내일의 짜장면이 또 준비되어 있을 테니, 일단은 출발이었다.
* 순우리말로는 ‘고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입에 잘 안 붙는다. ‘백조의 호수’ 대신 ‘고니의 호수’라고 했더니, 왠지 해물탕 느낌이 난다. 아무리 음식 이야기지만, 해물탕을 원한 건 아니어서, 습관처럼 ‘백조’라는 단어를 쓰고야 말았다.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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