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둘 엄마, 마흔살 나
엄마의 인생도 예외없이 본인의 예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엄마는 스물네 살에 둘째 이모의 소개로 만난아빠와 결혼을 했고, 그 이듬해에 나를, 다시 1년 반 뒤에 내 동생을 낳았다. 아빠는 가장으로서 나름의 경제력과 총각시절 차곡차곡 모아둔 자산, 그리고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재산까지 쥐고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엄마는 단 한번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스스로를 지키며 살겠다는 무언의 선언처럼 늘 일터로 향했고, 예순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일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항상 다른 엄마들보다 바빴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늘 분주했다. 어린시절의 나는 아빠가 벌어다 주는 돈만으로도 충분히 풍족하게 살 수 있는데,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처럼 집에 편히 있지 않을까 다소 의아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하는 엄마를 둔 덕에 남들은 하나 가질 선물꾸러미를 둘,셋 실컷 가질 수 있었으니, 서운함보다는 늘 자랑스러움이 앞섰다. 엄마가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식탁은 늘 따뜻하고 맛있었으며, 집안은 언제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외벌이 남편의 눈치를 보며 살기에 자식 성적에 목숨을 거는 다른 아줌마들 같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게 부부사이 힘의 균형을 지키는 엄마.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경제력을 참 든든하게 여겼던 것 같기도하다. 돈을 버는 것이 유세는 아닐지라도, 그 때 목격한 엄마의 노고와 두 분의 팽팽한 균형감은 현재 나의 결혼 생활에서 자존감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이십 년 넘게 내 무의식에 쌓인 그 생활의 기록 덕분에, 나는 세상이 뭐라 한들 쉽게 픽 하고 쓰러지지 않는 단단한 전사가 될 수 있었다.
주변의 못된 마음을 먹은 이들은 엄마를 향해 '주체할 수 없는 본인의 욕심 때문'이라느니, '친정에 돈을 보태주려는 것 아니냐'는 식의 자격지심 섞인 비난을 남몰래 투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의 뒷담화는 내 알 바 아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조잡한 이유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엄마의 친정 식구들은 모두 완벽히 자립한 상태였고, 엄마보다 더 부지런했던 외할머니 역시 경제적 고민 없이 사셨다. 그들은 돈의 액수보다 '버는 행위' 자체에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느끼는 종족들이었다. 누구도 요구한 적 없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외갓집 식구들은 늘 그렇게 부지런했다.
나 역시 그런 엄마를 지독하게 닮았다. '결혼 후 남편의 경제력이 어떠하든, 내 부모의 재산이 얼마이든 상관없이, 내 일은 나를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자 성인으로서 꼭 갖춰야 할 충분조건'이라는 가치관. 이 단단한 생각이 때로는 10%쯤 내 가슴을 옥죄는 선천적 타이트함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나머지 90%는 말 그대로 낯선 타국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는 가장 강력한 갑옷이 되어준다.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는 엄마가 서른두 살이 되던 해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우리가 어릴 때는 매주 귀여운 손녀들을 보여주러 외할머니댁에 방문하곤 했는데, 어느 날 찾아든 부고 소식을 끝으로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지워지셨다. 7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엄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나이가 지긋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언니들을 엄마 삼고, 오빠들을 아빠 삼아 자란 막둥이였다. 내가 세 살 무렵, 엄마가 채 서른이 되기도 전에 외할아버지마저 하늘로 보내셨으니, 엄마는 서른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미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가 된 셈이었다.
마흔이 된 지금의 나는 다행히 두 부모님이 모두 건강하게 살아계신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한 부모의 큰딸로 태어난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슬픔이자 거대한 상실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내가 너무 어려 기억이 없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방 안을 가득 채웠던 곡소리와 사람들의 울부짖음은 옆방에서 친척 언니들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어린 나의 가슴속에 깊은 파동으로 남아있다.
그날 엄마는 거의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울고 있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몸을 가눈 채,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어렸던 나도, 중년이 된 지금의 나도 그 슬픔의 깊이를 감히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첫 번째로 엄마의 내면에서 거대한 세계 하나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직감했고, 두 번째로 그날 처음으로 '엄마도 원래는 엄마가 아니라, 누군가의 애틋한 딸이었다'는 사실을 옅보았다.
나는 생각한다. 내 엄마가 나보다 명백한 '어른'인 순간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이 대목이라고. 서른두 살에 부모를 모두 떠나보낸 딸로서의 시간. 그 감정의 층위만큼은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내 결혼식 때 40대 후반이던 엄마와, 현재 마흔인 나의 인생 그래프를 겹쳐놓고 볼 때, 엄마만이 가진 가장 거대한 경험치는 바로 그것이다. 내가 모르고 엄마만이 아는 감정의 절대적인 영역. 물론 엄마는 '이민'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겪어본 적이 없으니, 이민 15년 차를 통과하는 딸내미의 삶과 감정, 그 안의 정서적 과부하를 결코 이해할 리 없겠지만 말이다.
내 부모를 언제든 볼 수 있는 상태와, 보고 싶어도 영원히 볼 수 없는 상태는 분명 분자 구조부터가 다를 것이다.
그래서주말 저녁, 한국에서 캐나다까지 태평양을 건너 걸려 오는 엄마의 전화를, 이제는 조금 아주 조금은 받아보도록 노력해야 하는 걸까... 하는 기묘한 망설임이, 아주 잠깐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른둘에 고아가 된 엄마의 슬픔을 아는 딸이, 왜 태평양 너머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를 단호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 자신과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한 '선택적 단절'의 진짜 이야기는 오직 멤버십 공간에서만 이어집니다.